完/양봉나빙 매화

양봉 나빙(1733~1799)의 매화그림

Moam Collection 2010. 1. 20. 09:52

양봉 나빙(1733~1799)의 매화그림으로 풀어 본 한중관계

 

 

 

연전 한국 중국간의 고구려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한창이다. 이런 와중에 과
거 중국 연경 학계와 조선 학자들간의 문
화적 교유를 보여주는 그림이 발견되었
다. 시카고박물관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의 나양봉(양봉兩峰나빙羅聘,
1733~1799) 필 매화그림이 그것이다.


이 그림에 더욱 관심과 눈길이 가는 이
유는 그림 오른편 가장자리, 표구된 부분
(마운트) 안에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자
작시와 설명 등이 친필로 적혀있다는 점
이다. 이 그림을 바라보며 필자는 현재까
지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보고된 채 박물
관 수장고에서 오랜 시간 묻혀있던 이 그
림에 대한 애틋함과 이 그림이 어떻게 미
대륙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시카고박물

관에까지 오게되었는지 그 경로가 궁금해졌다.
어째서 추사가 이 그림에 이와같은 자작시와 글을 남기
신 것일까? 그림으로 다시 눈길을 옮기니, 양주팔괴揚州八
怪중 한분인 나양봉의 독특하고 호방한 필치로 좌우로 꺾
이고 끊어지며 그려진 매화가지와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면좌측 하단의 시구를 훑어보니 굉장히 눈에 익숙한 단
어‘육교’가 눈에 들어온다.

 

 

시구를 살펴보자.


東閣一詩三楚白, 孤舟再夢六橋春
동각일시삼초백 고주재몽육교춘


동각1)의 시는 삼초2)를 밝게 비추고, 외로운 배에서 다시
꾼 꿈은 육교3)를 따뜻하게 한다.


나양봉의 이 시구는 기나 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넓은 대
지에 따뜻한 봄이 온 기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兩峰道人畵於京師宣武坊僧舍
양봉도인화어경사 선무방승사


양봉도인(나빙의 호)이 경사4)에 있는 선무방승사에서 그
렸다.


아니‘육교’라면 추사의 친구이자 당대 조선의 최고 수

장가였던 이조묵(1792~1840)의 호가 아니던가! 이제야 이 그
림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김정희의 시구와 글씨를 살펴보자.

 

  

 

朱草林中綠玉枝, 三生舊夢訂花之,
應知霧夕相思甚, ? 蘇齋畵扇詩
주초림중녹옥지, 삼생구몽정화지,
응지무석상사심, 추창소재화선시


붉은 풀숲5) 중 파란가지6), 삼생7)의 오랜 꿈이 꽃으로 맺
혔네.
안개 낀 저녁 서로 생각함이 깊음을 아니, 소재(옹방강)
그림부채의 시가 슬프고 슬프구나.


이 시구를 보며, 추사의 봄을 알리는 매화가 핀 기쁨과
소재 옹방강 선생(1733~1818)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추사는 이 시를 쓴 후, 시 아래에 설명을 덧붙인다.


兩峰先生夢前身爲花之寺僧, 翁覃溪先生藏兩峰畵梅扇
與瘦同穀人秋史同題絶句有霧夕相思筆語
양봉선생몽전신위화지사승, 옹담계선생장양봉화매선.
여수동곡인추사동제절구유무석상사필어


양봉선생은 전생에 자신을‘화지사승’8)이라 칭했다. 옹

담계 선생이 나양봉의 매화부채를 가지고 계셨다. 여수동
곡인9) 추사가 안개 낀 저녁 서로 그리워함[생각함]을 [담
계의 시와] 같은 절구로 제한다.


이 글로 미루어, 담계 선생의 수장품 중 나양봉 필 매화
그림 부채가 있었고, 그 부채 위에 담계 자신이 시를 적어
놓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추사는 이 매화그림을 보
고 담계의 그 시를 생각하고, 상사심의 뜻으로 같은 절구10)
를 사용하여 이 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중국 어딘
가에 나양봉의 매화그림과‘주초림중녹옥지’의 절구로 시
작되는 시구가 적힌 부채가 전한다면, 그 작품이 담계 선생
이 수장하셨었고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작품일 것이다.

 

그림에 대한 조사 중‘완당전집 권 십(10)’(pp. 40-41)과 국
역 완당전집 3권 (솔출판사 1996, pp. 177-178)에서 같은 시[제
나양봉매화정]를 발견하였고, 잘못된 글자 2자와 시구 해석
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증證 ->정訂”, “시時 ->시詩.”
또, 이 시의 원전이 이 나양봉 매화그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辛未閏月秋史正喜題于天際鳥雲樓雨中試
兩峰先生師冬心先生. 手造五百斤油墨

신미윤월추사김정희제우천제오운루우중식.
양봉선생사동심선생. 수조오백근유묵


신미년윤월(1811) 추사 김정희가 비오는 중 [아마도 봄을 알리는‘봄비’
였으리라] 천제오운루天際烏雲樓에서 제한다. 양봉선생의 스승은 동심
(김농) 선생이다. 수조 오백근 먹(구입가격)


이 연도(신미년)로 미루어 이 글은 추사선생이 그의 나이 26세때[만 25
세] 비오는 날‘천제오운루天際烏雲樓’에서 쓰셨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글씨들은 추사의 26세시의 글씨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천제오운루’는 어디인가?


이‘천제오운루’의 해답을 찾기위해선 이조묵李祖默이란 인물에 관하
여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천제오운루’는 이조묵 서재의 이름
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육교六橋라는 호의 사용연대도 이 그림의 수
장과 그 때를 같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위에서 잠깐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조묵은 조선 당대 최고의 수장가였
고 추사의 후배이자 친구로, 추사의 소개로 연경에 다녀오고 연경학계
와 많은 교유를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제외한
많은 부분들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그림의 발견으로 이조묵
이 추사가 연경에 다녀온 바로 그해, 1810년 추사의 소개로 연경에 들어
가 옹방강을 그의 서재 보소재에서 만났고, 감격스럽게도 옹방강 자신

이 직접 모사한‘천제오운첩’을 하사받았었고, 또 많은 연경의 문사들과
묵연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돌아오는 중 이 매
화그림을 비롯한 많은 고서화들을 수집하여 돌아왔음을 생각할 수 있
다. 이로 인해 자신의 호를‘육교’라 짓고,‘ 천제오운첩’으로 맺어진 담
계 선생과의 묵연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당호를‘천제오운루’라 이름
지었으리라. 나양봉의 매화그림을 손에 넣고 온 이조묵은 1811년 이른
봄 자신의 서재 (천제오운루)에 추사선생을 초대하여, 이 시와 글을 부탁
하게 되었던 것이다.


평생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수집에 몰두하였던 이조묵은 말년에
생활이 곤궁하여지고(오세창,‘ 근역서화징, 권오(5)’, pp. 226 - 227; 국역 근역서
화징- 하, p.902 시구 참조), 그의 사후 그 후손들에 의하여 그 방대한 컬렉
션이 흩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과정 중 이 매화그림은 갑인년 3월
(1914)‘소련산인’이라 아호를 사용하는 분의 소장품이 되었다가, 어느
때인가 시카고의 사업가 Mr. Hulburd Johnston이라는 분의 수장품이 되
었고, 그 분에 의해 1957년 9월 25일 시카고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원래 보고되었던 것과 다르게 중국에서 들어온
그림이 아닌 한국에서 건너간 그림이다. 또한 표구된 형식이 중국 작품
과 많이 다르다는 여러 동료들의 조언도 이 생각에 확신을 갖게 했다. 이
그림에 관한 조사를 하며 연경학계와 추사에 관한 교유 못지 않게, 이조
묵과 연경학계 교유를 더욱 깊게 연구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

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 당시 한국(조선)과 중국 명사들의 교우를 살펴보
며, 작금의 한중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양봉의 이 그림과 이 그림을 통한 사실들이 현재의 한·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
를 넌지시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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