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s of art/Works in Korea

미암선생집_나경

Moam Collection 2010. 3. 6. 19:20

미암선생집_나경

 

 

미암집 1

   

미암집 2

 

미암(眉巖·유희춘의 호)선생집 ‘입춘나경의立春裸耕議’

'입춘나경에 관한 논의'

 

"(입춘 나경은) 먼 변방의 비루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를 해괴하게 여기지만 백성들은 즐거워한다. 매년 입춘 아침에 지방관 앞에 모이게 한 뒤 관문(官門) 길 위에서 나무로 만든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여 심고 거두는 형태에 따라 한 해를 점치고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다. 이때 밭을 가는 자와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옷을 벗게 하여 차가운 기운을 몸에 닿게 하니, 이 얼마나 해괴한가? (이 제도가 시행되는 이유에 대해) 관에 물으면 백성의 풍속이라 하고, 백성에게 물으면 관에서 시킨 일이라 말한다."

미암집 中

 

'나경'에 관한 글이나 다른 기록은 일제강점기시 조선일보 논설고문이었던 故 이규태 선생이 남긴 기록인 "함경도에 나경 풍속이 있었다"는 짧은 기록 뿐이다. 이외의 다른 자료나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학계의 '농경문청동기'에 관한 연구성과는 미미하다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농경문 청동기는 한해의 풍요를 기원하는데 쓰였을거라 추정되는 '의식, 제례용 의기'였다라는 정도이다. 필자는 이내 의문이 든다. 정말 이 '농경문청동기'가 제례용 의기의 용도로만 쓰였을까? 그리고 이미 학계의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듯 농경문청동기에 나타난 '나경'의 모습과 일제강점기시 함경도 등에서 행하여 지던 '나경'의 관계를 바로 연결시키는것은 좀 무리가 따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어떤 형식으로든 그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꼭 같다 할 수는 없을거라 생각한다. 또 농경문청동기에 나타난 나경의 모습은 한 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 이외에도 다산 등을 의미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

 

청동은 잘 알고있듯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굉장히 귀한 물품이었고 당영히 청동기로 만들어진 작품도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농경문청동기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문양과 디자인 등은 현대의 과학으로도 완전히 풀지 못하는 과학적 비밀을 가지고 있는 다뉴세문경과 같이 그 세련됨과 정교함이 세문경에 못지않다. 그리고 기원전 4~3세기의 한반도에 존재하였던 정치,사회집단(국가의 성립 시기에 관한 많은 노란이 있기때문에 '국가'라는 용어의 사용은 피한다)은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간과하면 안된다.

 

위 사실들로 종합해보면, 물론 이 농경문청동기가 의기로 사용되었음을 의심할 수 었지만, 의기 그 이상의 의미인 당시 충청지역에 존재하였던 정치, 사회집단의 장(왕, 우두머리)이 소유하였던 신분의 상징이자 그 집단의 보물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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