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솜

삼십 년 세월이 한 조각 꿈인 듯_표암 강세황

Moam Collection 2009. 10. 24. 05:45

 

도 1. 강세황, ‘자화상’, 견본담채, 88.7×51.0cm, 1782, 개인소장, 보물 제590호 

 

"저 이는 누구이냐?"

얼굴과 이마,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 그리고 조금은 비루하고 옹색해 보이는 얼굴의 노인이 머리에 관모(조사모)를 쓰고 몸은 일반 옥색도포를 걸치고 가슴에 진홍색 세조대를 하고 정좌하고 있다. 얼굴과 몸이 왼쪽으로 조금 틀어져 있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평복 도포를 입고 가슴에 진홍색 세조대를 하고 두 손과 다리를 도포안으로 숨기도 있는 저 괴상한 노인은 누구일까?

 

화면 상단 좌우에 적혀있는 찬문을 살펴보자.   

 

彼何人斯鬚眉晧白 

 頂烏帽披野服 於以 

見心山林而名朝籍   

胸藏二酉筆搖五嶽 

人那得知我自爲樂   

翁年七十翁號露竹

其眞自寫其贊自作

歲在玄黓攝提格

‘姜世晃印’ ‘光止’

 

수염과 눈썹이 모두 매우 흰 저 이는 누구인가

조모를 머리에 이고 야복을 걸쳤네 이에

마음은 산림에 있으나 이름은 조적(관직명부)에 있음을 알겠구나

가슴에 이유(수많은 책들)를 감추고 붓으로 오악을 흔들었네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나 홀로 즐거움을 위함이다

늙은이 나이는 칠십이고 늙은이 호는 노죽(로죽)이다

그 진(초상그림)은 스스로 그렸고 그 찬도 스스로 지었다

세재는 임인년(1782)이다

‘강세황인姜世晃印’ ‘광지光止’

 

노인의 호가 '노죽'이라 하고 '광지', '강세황인' 도인이 찍혀잇으니 이는 강세황(, 1713~1791)이 직접 그리고 쓴 자화상이다. 강세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이자 평론가로서 작품활동과 화평(畵評)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불리던 인물이다. 『근역서화징』<강세황>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첨재(忝齋), 본관은 진주. 녹문(鹿門) 조위봉의 외손이며 백각(白閣) 강현의 아들. 숙종 39년 계사생. 음관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여오 52년 병신년(1776)에 기로과에 합격하고 벼슬은 한성판윤. 죽은 나이는 79세.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니 아버지 강현과 외조부 조위봉이 모두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났다.(국조문과방목) (중략)"

 

근역서화징에 이 외에도 많은 내용이 전하지만 이곳에 옮기지 않는다. 사실 강세황의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등 다양하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높은 식견과 안목을 두루갖춘 문인화가로 강세황은 한국적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과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그림 소재의 입체감, 원근 등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그의 나이 51세때 영조대왕이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한 일을 계기로 강세황이 오랫동안 절필했던 일화와 단원 김홍도와 자하 신위가 강세황의 제자였던 사실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다. 이런 그가 왜 이러한 자화상을 남겼을까? 이는 그림에 쓰여있는, 위에서 살펴 본, 자찬과 강세황이 그의 나이 54세 때 쓴 자서전인 《표옹자지 豹翁自誌》에 있는 한 내용으로 유추 할 수 있다.

 

"내가 일찍 직접 초상화를 그렸는데 다만 그 정신만을 잡아서 그린 것이라 속된 화공들이 그저 모습 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현저하게 달랐다.(중략)" 

『표암유고豹菴遺稿』 권 6 「표옹자지豹翁自誌」 중

 

이렇듯 강세황은 자신이 그린 자화상을 그저 자신의 외양만을 충실히 묘사하는데 그친것이 아니라 외형보다 정신, 내면의 표현을 강조했던 문인화의 정수를 가미하여, 자화상에 자신의 심정, 마음까지 새겨 넣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글에 이런 진부한 내용을 적으려 한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돌리자. 자화상 얼굴을 살펴보면, 얼굴의 근육과 살결을 나타내는 육리문(肉理紋)을 이용한 묘사에 음영(陰影)을 표현함으로써 입체감을 나타내고, 매우 정밀한 세부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의복의 표현을 살펴보면, 도포에 짙은 옥색선을 긋고 같은 빛깔로 엷게 채색을 하였는데, 주름진 부분을 짙은 선으로 표현하고 의습선은 조금 엷게 그리고 주름선 그 주변에 음영을 표현하여 얼굴에서와 마친가지로 입체감을 준다. 얼굴을 살피다 보니, 자찬의 해석내용과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彼何人斯鬚眉晧白(수염과 눈썹이 모두 매우 흰 저 이는 누구인가?)"

 

그림을 살펴보면, 수염은 분명 흰색이나 눈썹은 희지않다. 오히려 검은색에 가깝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화면을 다시 살펴보니 주인공 얼굴 내 눈썹과 눈 주위, 코, 광대, 수염이 난 입 주위가 밝게 표현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면, 이 자찬 부분의 해석을 "흰 수염과 그 주위가 밝게 빛나는 저 이는 누구인가?"로 고쳐야 좀 더 정확한 풀이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 풀이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찬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삼십 년 세월이 한 조각 꿈인 듯  

강세황은 서울에서 부친 강현(姜鋧)의 3남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고, 1727년 동갑내기인 진주 류씨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비록 가난에 찌든 길고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지만 이들 부부의 금슬(瑟)은 무척 좋았던듯,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豹菴遺稿』 에 그의 부인과 그 부인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시(도망시, 도망가, 만시, 만가)가 여러편 전한다. 부인 류씨는 강세황과 혼인하여 인·완·관·빈 네 아들을 두고 30년간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며 살다 1756년 5월 1일 4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 '사랑'의 의미는 지금의 '사랑'과 사뭇 다름이 느껴져 마음의 울림이 더욱 크고 깊다.   

 

한 수를 살펴보자.

 

音容一隔杳難追 

卅載光陰片夢疑 

此日傷心無限事 

 何由報與九泉知  

 

『표암유고豹菴遺稿』 권 1 「도망팔절悼亡八絶」중 한 수

 

목소리 얼굴 한 번 멀어지니 아득하여 추억하기 어렵고

삼십 년 흐른 세월이 한 조각 꿈인 듯 헛갈리는구료  

오늘 애타는 마음 끝이 없는데

어찌 구천(저승)에 써 알려 (이 마음) 알게하리오

  

 

도 2. 『표암유고豹菴遺稿』중 부분 

 

이 시는 결혼 후 30년 간 고생만 시키다 허로병에 전염병이 겹치어 죽은 아내 류씨를 그리워 하며, 부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 슬픔을 한 수의 시로 지어 절규하며 부르는, '예원의 총수'나 '한성판윤' 강세황이 아닌 인간 강세황의 '망부가(亡婦歌) '이다.

 

조선시대 문집들을 살피다 보면, 이러한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망부가(亡婦歌)'들을 적지않게 볼 수있다. 이는 비록 물질적으로 퐁족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부부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아끼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몸'뿐아니라 '정신'까지 함께하며 살았다는 반증은 아닐까? 지금 누가 이런 '망부가'를 지어 부르겠는가?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豹菴遺稿

經山集

警修堂全藁,

海巖稿

槿域書畵徵

최순우, "姜豹菴" (『考古美術』110, 1971) 

배정룡, "豹菴姜世晃의 山水畵硏究" (『考古美術』 138·139, 1978)

변영섭, "豹菴姜世晃의 繪畵硏究"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86)

최완수 외, 『진경시대_예술과 예술가들』, (돌베게, 1999)

전송열, 『옛 사람들의 눈물』, (글항아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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