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솜

삼생이 있단 말이 헛말이 아니거든

Moam Collection 2009. 11. 25. 09:33

동해에서 날아든 룡

 

도 1. 김은호, 『율곡栗谷 이이李珥』, 1975, 오죽헌烏竹軒 문성사文成祠

 

한 인물이 멋스런 좌대에 앉아 조용하고 그윽하게 타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이 곧게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몸이 왼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검은 복건幞巾을 머리에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두 손을 소매 속에 가지런히 모으고 좌대에 앉아 있는 이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한 층 끌어 올린, 거유巨儒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영정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존영의 모습이 실제 이이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은 당시 정부의 '표준영정제도'에 의하여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에 의하여 1975년 그려진 그림으로, 전해오는 율곡의 초상화가 없어 그 후손의 모습을 참조하여 그려졌다. 과거 친일행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는 김은호와 그의 손으로 그려진 율곡 이이의 존영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어찌되었건 율곡 이이의 복식으로 '복건'과 '심의'를 선택하여 '성리학자'의 모습을 그린것은 잘된 선택이라 생각된다. 영정의 세세한 설명은 그만두고 이쯤에서 덮자.

 

이율곡 필 서간李栗谷 筆 書簡 유지사柳枝詞

퇴계 이황과 더불어 율곡 이이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고 친숙한 인물이다.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 중 한 분으로 조선의 성리학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조선 성리학과 철학의 수준을 한 층 드높였던 큰 스승이라 할 수 있다. 근엄하기만 했을것 같은 선비였던 그에게 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서간이 전한다.

     

도 2. 이이, 『이율곡 필 서간李栗谷 筆 書簡』, 조선시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유지사柳枝詞』라고도 불리우는 이 작품은 본래 언론인이자 경제학자였던 성재誠齋 이관구李寬求(1898-1991)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이 작품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자.

 

"柳枝士人女也 落在黃岡妓籍 余按海西時 以丫鬟爲侍妓 纖細妖冶貌秀而心慧 余撫憐之 初非有情慾之感也  厥後 余以遠接使 往來關西 柳枝必在閤 而未嘗一日相眤  癸未秋 余自首陽 省女嬃于黃岡又□柳枝同杯觴者數日 還首陽時 追送余于蕭寺 旣別 余宿于栗串江村 入夜 有人扣扉 乃柳枝也 一笑入室 余怪問其由 則其言曰 公之名義 國人皆慕 況號爲房妓者乎 且見色無心 尤所嘆服 此別後會難期 故玆敢遠來耳 遂明燭夜話  噫 娼家只愛浪子之多情 孰知有義之可慕者乎 不以不見親爲恥 而反服焉 尤所難淂 惜乎 女士困于賤隸也 且過客疑余 有枕席之私 莫之顧眄 則國香尤可惜也 遂製詞以敍其實 發乎情止乎禮義之意 則觀者詳之

 

유지는 선비의 딸이다. 몰락하여 황강 기적에 있었는데  내가 황해도에 있을때 계집종으로 시기(시중을 드는 기녀)로 삼았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용모가 빼어나고 심성이 총명해 내가 어루만지고 어여삐 여겼으나  처음부터 정욕의 감(느낌)은 있지 아니했다. 그 후 내가 원접사로서 관서를 오고 갈적에 유지는 필히 마을에 있었겠지만 하루도 서로 본적은 없다. 계미년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강으로 누님을 뵈러 갔을 때 다시 유지를 (만나) 술자리에서 수일(여러 날)을 함께 했는데, 해주로 돌아올 적에 절(소사)에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이미 이별하고 내가 율곶강촌에서 묵고 있는데, 밤이 들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보니 뜻밖에 유지였다. 일소하며(방긋 웃으며) 방으로 들어오므로 나는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공의 명의는 국인이 모두 흠모하온데, 어찌(하물며) 침실의 기녀 되기를 고하기 위함이겠습니까? 또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 더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에 이별하면 후에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기로 이에 감히 멀리까지 온 것이옵니다." 하므로, 마침내 촛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다만 낭자(뜨내기)들의 다정을 사랑하는 것이어늘, 누가 도의를 사모하는 자가 있는 것을 알겠는가! 친함을 보이지 않는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오히려(반대로) 감복한다는 것은 더욱 얻기 어려운 바이다. 애석하구나! 여자로서 천한 종으로 곤하게 살아가다니. 또 지나는 이들이 사사로운 잠자리가 있었는지 의심하여, 돌아보아 주지 않는다면 곧 국중일색이 더욱 애석할 것이다! 마침내 시를 지어 그 사실을 적음으로써, 정에서 시작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밝히는 것이니, 보는 이들은 자세히 알라. 

 

若有人兮海之西  鍾淑氣兮禀仙姿  綽約兮意態  瑩婉兮色辭

金莖兮沆瀣  胡爲委乎路傍  春半兮花綻  不遷金屋兮哀此國香

昔相見兮未開  情脈脈兮相通  靑鳥去兮寒脩  遠計參差兮墜空

展轉兮愆期  解佩兮何時日  黃昏兮邂逅  宛平昔之容儀

曾日月兮幾何  悵綠葉兮成陰  矧余衰兮開閤  對六塵兮灰心

彼妹姿兮妧姩  秋波回兮眷眷  適駕言兮黃岡  路逶遲兮遐遠

駐余車兮蕭寺  秣余馬兮江湄  豈料粲者兮遠追  忽入夜兮扣扉 

逈野兮月黑  虎嘯兮空林  履我卽兮何意  懷舊日之德音 

閉門兮傷仁  同寢兮害義  撤去兮屛障  異牀兮異被

恩未畢兮事乖  夜達曙兮明燭  天君兮不欺  赫臨兮幽室

失氷洋洋佳期  忍相從兮鑽穴  明發兮不寐  恨盈盈兮臨歧 

天風兮海濤  歌一曲兮悽悲  繄本心兮皎潔  湛秋江之寒月 

心兵起兮如雲  最受穢於見色  士之耽兮固非  女之耽兮尤感

宜收視兮澄源  復厥初兮淸明  倘三生兮不處  逝將遇爾於芙蓉之城

 

바다의 서쪽(황해도)에 사람이 있어  맑은 기운 모아 선녀의 모습을 내리었네. 

얌전하고 아름답구나 마음과 모습이 밝고 어여쁘구나 얼굴과 말소리여                

금경(감로甘露, 곧 이슬을 받기위한 대야인 동銅으로 만든 승로반承露盤을 바치는 구리 기둥) 한밤중의 이슬 기운이 어찌 길가에 버려졌나. 봄(남녀의 정)은 한창이고 꽃이 피었는데 금옥으로 옯기지 못하니 애석하구나! 이 국향이여.

예전 서로 보았을때 아직 안 피어  정만 맥맥히 서로 통했고,

청조는 추위와 매마름으로 가고 먼 앞날을 위한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이랬다 저랬다(되풀이하며) 기약들 지나치고 마음먹고 풀날은 어느 날이런가.

황혼에 우연히 만났으나   예전의 의용이 완연하구나.   

일월(세월)이 더해진 것이 얼마인가   슬프구나 녹색의 잎이 그늘을 이뤄 어두워짐이   

하물며 나는 쪽문을 열기에 쇠했고 육진(여섯가지 욕정)을 대함에 마음이 재가 됐다네.      

저 자태를 꾸미는 아름다운 여인이여 연모하는 사랑의 눈짓을 돌리는가 

수레를 타고 황강으로 감이 길은 굽이굽이 멀고 더디구나.  

내가 소사에서 수레 머물고  강가에서 말을 먹일 때  

어찌 헤아릴 수 있었으리오 어여쁜 이 멀리 따라와 밤이 들자 홀연히 내 방문 두들길 줄을    

아득한 들에 달은 어둡고 빈숲에 범 우는 소리 들리는데  

나를 뒤밟아 온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옛날의 덕음(좋은 평판, 명망)을 생각해서라네.   

문을 닫는 것은 인정을 상하게 하고 같이 자는 것은 의를 해하니  

병풍을 걷어치워도 자리도 달라 이불도 달라  

은정을 다하지 못하니 일은 틀어져  밤부터 동이 틀때까지 초를 밝히고 보내는구나.   

천군(사람의 마음)을 어찌 속이겠는가 유실(조용하고 그윽한 곳에 있는 방)에 임하여 나타났으니. 

양양한(한없이 넓고 많은) 혼인기약 잃어버리고  서로 따라 욕정을 둘이 참았네   

동이 트도록 잠 자지 않고  임하는곳이 다르니 가슴엔 한만 가득      
하늘엔 바람 불고 바다엔 물결치고 노래 한 곡조 슬프기만 하구나   

아아! 본심 깨끗하고 맑아 가을 강에 괴인 달과 같구나.  

마음에 구름과 같은 병기 일적에 색을 보는 것에서 받는 더러움이 제일이거니    

선비의 탐욕은 굳지 못하고 계집의 탐욕은 더욱 더하니       

마땅히 시선을 거두어 근원을 분명히 밝히고 이에 처음의 맑고 밝음으로 돌아가야지.   

만약 삼생(전생, 현생, 후생)이 있단 말이 헛말이 아니거든 장차 죽어 부용지성에서 너를 만나리. 

 

復申以短篇三首  

天姿綽約一仙娥 十載相知意態多 不是吾兒腸木石 古緣病衰謝芬華

含悽遠送似情人  只爲相看面目親 更作尹邢說爾念 病夫心事已灰盡

每惜天香棄路傍 雲英何日遇裵航 瓊漿玉杵非吾事  臨別還遡贈短章 

癸未九秋念八日 栗谷病夫 書于栗串江村

 

거듭 단편삼수로 대답한다.

하늘의 자태와 얌전함 하나의 선녀로구나. 십 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 

무릇 내가 목석같은 사내이기야 하겠나마는 병들고 쇠하여 분화를 사양함일세. 

슬픔을 머금고 사정인을 멀리 보내나 다만 서로간에 면목이 친했을 뿐 

다시 나면 네 뜻대로 따라주련만  병든이의 심사가 이미 다한 재와 같은걸    

비록 길가에 버린 천향이 애석하지만 '운영'과 같이 '배항' 을 언제 만날까. 

구슬 음료(미음), 옥절구[선계]는 내 일이 아니어서 이별에 임해 돌아가며 단장(짧은 문장)을 써 준다.   

계미년(1583) 가을 9월 28일 병부 율곡이 율곶강촌에서 쓰다."

 

이 상에서 서간의 전문을 알아 보았다. 많은 부분 의역을 한 때문인지 세간에 전하는 「유지사」 풀이가 정확하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는 이「유지사」가 『율곡전서』에 전한다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율곡전서栗谷全書』의 「제가기술잡록諸家記述雜錄」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율곡이 유지에게 시를 남겼다는 사실만 언급되어 있을 뿐 시의 원문은 실려 있지 않다. 부가설명과 시의 원문은 살펴본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서간에만 전한다.

 

만일 삼생이 있단 말이 헛말이 아니거든

이 서간은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 부분에 지금까지 유지와의 일들을 세세히 모두 적었다. 유지의 집안 내력을 시작으로, 이미 이별했으나 당시 여자의 몸으로 원행을 하여 율곡 자신이 머물고 있는 율곶강촌의 한 소사로 찾아온 일까지의 모든 기록을 적고, 마지막에 이 글을 보는 이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둘 사이의 '정'에서 시작하여 '예'로 끝난 맑고 깨끗한 관계를 분명히 한다. 이 후 장문의 운문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 속에 율곡의 유지를 어여삐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난다. 이러한 절절한 마음은 시의 마지막 "만약 삼생(전생, 현생, 후생)이 있단 말이 헛말이 아니거든 장차 죽어 부용지성에서 너를 만나리."에서 절정으로 치달으며 시를 맺는다. 이 문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기녀 유지의 선견지명 이었을까? 율곡은 이글을 적어 준 후 약 삼개월 만인 1584년(선조 17년) 정월 16일 유명을 달리한다. 다음 마지막 세 수의 짧은 시로 글을 마무리하는데 한 가지만 짚자. '復申以短篇三首(거듭 단편삼수로 대답한다)' 부분을 살펴보자. '반복하여(거듭) 대답한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당시의 정황이 서로 운을 띄우고 글을 지어 준 듯하다. 이를 보면 이이의 말대로 천기 유지가 총명하였으며, 거유 이이와 시를 주고 받을 정도의 학식 수준을 가졌었다 생각되어 놀랍다. 빼어난 미모와 학식을 갖추고 거기에 '도의를 사모한다,' 역시 율곡 이이가 다음 생을 기약할 만하다.   

 

문을 닫는 것은 인정을 상하게 하고 같이 자는 것은 의를 해하니  

천한 기생의 몸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아름다운 마음, 높은 학식, 거기에 '도道'와 '의義'를 깨닫고 '도'와 '의'를 숭상할 줄 아는 기녀 '유지.' 그렇다면 요즘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필자가 종종 집을 나설때마다 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어린 학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중 험한 말이 함께 나오지 않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고, 대중교통 내에서 어른들께 자리를 양보하는 분들을 보기 힘들었다. 불과 얼마 전, 30대인 필자 세대만 해도 서로 자리를 양보하려 했고, 이러한 풍경은 어디서나 흔한 광경이었다. 물론 이러한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몇가지 등을 통하여 현상을 일반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우리는 지금 우리의 소중한 그 무엇을 계속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율곡과 유지의 일화, 율곡에 의하여 기록된 글들에 남겨진 '기생 유지.' 이러한 '기녀 유지'의 모습이 당시 기녀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물론 아닐것이다. 하지만, 매양 언론 등에서 접하는 성폭력 사건들, 낙태, 무부분별하고 문란한 성관계 등등, 현재 우리의 성性에 관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필자 개인의 사사로운 판단은 분명히 있지만, '자유로운 성관계'도 각 개인들의 선택이기에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현재 우리의 모습들을 객관적으로 자세히 살피고 자랑스런 우리의 전통을 살리려는 노력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율곡의 서간문 사진'과 '율곡의 저서들'을 바라보며, 조선 선비의 그 진한 묵향이 가슴에 사무친다.

 

".....문을 닫는 것은 인정을 상하게 하고 같이 자는 것은 의를 해하니  ....."    

".....만약 삼생(전생, 현생, 후생)이 있단 말이 헛말이 아니거든 장차 죽어 부용지성에서 너를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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