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나이다 비나이다_다솜의 시작 웅녀설화
도 1. 전 지운영(1852~1935), <단군영정(부여 천진전 단군화상)>, 견본담채, 33.6 x 53.3 cm, 1910?,
개인소장(국립부여박물관 기탁관리)
도 2. (좌) 지성채(1899~1979), <단군초상>, 1946, 대종교; (우) 홍석창, <단군초상>, 1977, 현정회
우리의 시조, 단군왕검
화면의 중앙에 인자하고 후덕한 모습의 노인이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조용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머리는 길게 땋아 두르고 망사 형태로 보이는 덮개를 쓰고 있다. 그윽하고 인자한 눈빛을 머금고 있는 봉안鳳眼 형태의 눈, 짙은 눈썹, 굵고 곧게 뻗어 내린 코, 두툼한 입술, 그리고 크고 길게 내려온 양쪽 귀와 잘 다듬어진 길고 풍성한 수염 등의 표현으로 인자하지만 근엄함이 묻어나는 앞선 세대 우리의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이다. 어깨와 허리를 풀과 나뭇잎으로 치장한 발목까지 흘러내린 흰색 도포 형태의 겉옷을 입고 옷 소매에 두 손을 넣고 한층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만든 의자에 앉아 보는 이를 그윽하고 근엄하게 바라보고 있는 노인은 누구일까? 눈, 입과 귀 주위의 음영표현, 도포 형태의 겉옷 윤곽선과 주름은 짙게 그리고 그 안은 엷게 채색했으며 옷주름의 주변을 또한 음영 처리하여 입체감을 준다. 이는 다름아닌 우리의 시조로 알려진 단군영정의 한 모습(도 1)이다. 현재 다양한 모습과 형태의 단군영정이 존재하고 있다 알려져 있는데, 위 그림은 신라시대 화가 솔거가 그린 단군의 모습을 1910년경 대종교를 창건한 나철(羅喆, 1863~1916)의 요청으로 당시 대표적 화가였던 백련百蓮 지운영(池運永, 1852~1935)이 모사한 그림으로 전해진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현재 단군 그림은 여러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유포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단군 그림은 현재 대종교 소장본인 지성채(지운영의 아들) 화백의 그림(도 2 (좌))과 당시 '정부표준영정제도'에 의해 1977년 현정회의 의뢰로 그려지고 그 이듬해(1978) 공인된 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홍석창의 ‘정부 표준 단군 영정(도 2 (우))’이다. 이 두 그림이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공인된 단군의 모습이다. 어떻게 정부로 부터 인증을 받은 단군의 영정이 두개일까? 그리고 솔거가 그린 그림을 지운영이 모사했다 전해지는 단군영정(도 1)과 이 그림들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단군신화'로 더 잘 알려져있는 우리 다솜의 시작인 '웅녀설화'를 통하여 위 그림들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배경과 그 의미를 살펴보자.
일연의 삼국유사와 고조선[왕검조선]
현재 전하는 '단군'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13세기 말 승려 일연에 의하여 씌어진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전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古朝鮮 [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艸+兎], 樂浪, 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 [왕검조선]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어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요堯:고려 정종의 이름 '요堯'를 피하여 기록하기 위함]와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말함; 현재 전하는 『삼국유사』원본인 정덕본正德本에는 '환국桓國'이라 전하는데 일제시대 '환인'으로 날조되었다고 한다.)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바라여 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 이의 해석에 관하여 설이 분분하다.)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 인간(人間)세계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곧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 등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살피고 교화(敎化)했다. 당시 곰 한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神雄), 즉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해달라 기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 먹으며 삼칠일(21일) 동안 금기했는데, (금기를 100일 동안 잘 지킨)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고로 매일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주원했다. 이에 환웅이 임시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했다.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당요]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 요堯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니, 50년은 경인庚寅년이 아니라 정사丁巳년이므로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기니 궁홀산(弓忽山; 일명 방홀산方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무왕]이 즉위하던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몰래 돌아와 아사달(阿斯達)에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
당나라 <배구전(裴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었는데,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하면서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한(漢)나라가 나누어 세 군(郡)으로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곧 현도(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한서漢書에는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 네 군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세군을 말하고 이름 또한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록, 이 부분 뿐 아니라 모든 고대사 부분이,은 많은 풀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단군'의 기록(단군신화)을 역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신화로 볼 것인가?를 시작으로, 이 기록에 나타난 모든 지명의 위치 등 많은 부분이 명확이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성과 등으로 이 단군신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부각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기록의 전부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아직 힘들다.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환(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등의 사서에 비교적 상세히 전하지만 이 사서들의 내용을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다.(이 사서들에 관한 내용은 참고자료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주목할 만한 부분도 있기에 무조건 살펴볼 가치가 없다 할 수는 없다 생각한다. 이에 관하여 조선시대 전기(1485, 성종 16)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최부崔溥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중 「외기外紀」편의 편찬자들의 사론史論 부분을 참조 할 만하다.
檀君朝鮮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있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움에 그가 바로 단군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바로 당요의 무진년 때 일이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백악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상나라 무정 임금 8년인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臣等按]《古紀》云: 「檀君與堯並立於戊辰, 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享壽千四十八年.」 此說可疑. 今按, 堯之立在上元甲子甲辰之歲, 而檀君之立在後二十五年戊辰, 則曰與堯並立者非也. 自唐虞至于夏.商, 世漸澆漓, 人君享國久長者, 不過五六十年, 安有檀君獨壽千四十八年, 以享一國乎. 知其說之誣也. 前輩以謂, 其曰千四十八年者, 乃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之壽也, 此說有理. 近世權近, 入覲天庭, 太祖.高皇帝, 命近賦詩, 以檀君爲題, 近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帝覽而可之, 時論亦以近之言爲是, 姑存之以備後考.
[신 등이 생각키로]《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재위에 올랐으며, 우 그리고 하의 시대를 지나 상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48년이다」라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의심이 된다. 지금 생각건대, 요임금이 재위에 오른 것은 상원갑자 갑진년 때이며 단군이 재위에 오른 것은 그 25년 뒤인 무진년이니 '요임금과 더불어 재위에 올랐다'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당우로부터 하나라와 상나라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점차 각박해져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며 재위에 오래도록 있다하더라도 오륙십년을 넘기지 못하였는데, 어찌 유독 단군만이 1천48년의 수를 누리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겠는가. 앞선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1천48년이라 말하는 것은 단씨가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일 뿐이지 단군의 향년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 이야기가 이치에 맞다. 근래 권근이 황궁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하였는데, 태조 고황제가 권근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함에 '단군'을 시의 제목으로 하게 하였더니 권근이 시에서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천년은 족히 넘었도다」라 하니 천자가 그것을 살펴보고는 그럴 것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의 논평 또한 권근의 말을 옳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서 후에 고찰하여 볼 수 있도록 한다.
이와 같이 고대의 기록들을 살펴 볼 때에는, 많은 선학 분들이 지적한대로, 비판적 사고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고 있고 알고 있는 사실들은 이 세상의 모든 진리, 사실과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 아니 그보다 작은 부분일 수 있다. 때문에 모든 기록들을 비판적, 고증학적으로 살피되 모든 부분의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단군왕검이 창건했다 전해지는 '고조선'에 관한 주목할만한 많은 연구성과들이 나오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위에 언급했던 『환(한)단고기桓檀古記』등의 사서들에 관한 역사학계 연구자들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연구가 이루어 지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이 글의 뒷 부분 '웅녀설화'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넘어가기 전에 몇 가지 짚어보자. 먼저 부여 천진전과 대종교 단군영정 중 단군의 어깨와 허리부분에 치장된 풀과 나뭇잎에 관한 부분이다. 이 잎들에 관하여 풀과 나뭇잎이다, 신단수 잎이다 등 많은 설이 있으나, 필자는 어깨에 걸친 것은 마늘잎이고 허리부분은 쑥이라 확신한다. 전하는 말대로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도 1)'이 솔거의 원본을 지운영이 모사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웅녀가 쑥과 마늘을 먹고 단군을 잉태하였다는 내용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원본그림이 그려질 당시에도 잘 알려져 있었을 거라 생각되고, 쑥과 마늘은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단군'을 있게한 '생명잉태'의 매개체이자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또 영정에서 보이는 단군의 머리양식과 머리덮개, 의복, 그리고 신발 등에 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다음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해석에 관한 부분이다. 아래의 부분을 살펴보자.(다른 부분은 위 해제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이 부분의 해석을 대부분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 먹으며 삼칠일(21일) 동안 금기했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금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라 하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앞뒤의 문맥상 '삼칠일' 금기를 해서 곰이 사람의 몸을 얻은 것이 아니라, "곰과 호랑이 모두 '삼칠일' 동안 금기를 했으나 이 후 호랑이는 100일 동안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함이 좀 더 매끄럽고 정확한 해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에 실려있는 단군의 이야기는 신화일까?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대부분의 사가들과 마찬가지로, 필자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신화적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구분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가리지 않고 그 나라, 민족 역사의 첫 장은 대부분 신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에 역사적 사실들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삼국유사 』에 전하는 '단군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신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추려내는 일이 바로 역사가들의 임무라 생각한다. 또한 표제가 『삼국유사三國遺事』인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기史記, 사史'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유사(遺事: 일, 사건 등을 남김.)' 단어를 선택하여 사용함으로써 일반 사서들과 달리 저자의 자유로운 편찬의도를 담을 수 있었다 생각한다. 이와 같은 저자 일연의 뜻은 그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도 3. 일연, 『삼국유사三國遺事』, 규장각 소장 (출처: 한국 브리테니커)
紀異卷第一
叙曰.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然而帝王之將興也. 膺符命, 受圖籙, 必有以異於人者. 然後能乘大變, 握大器, 成大業也. 故,河出圖, 洛出書, 而聖人作. 以至虹繞神母而誕羲, 龍感女登而生炎. 皇娥遊窮桑之野. 有神童自稱白帝子, 交通而生小昊, 簡狄呑卵而生契, 姜嫄履跡而生弃, 胎孕十四月而生堯,龍交大澤而生沛公. 自此而降. 豈可殫記.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기이권제일
첫 머리에 말한다.(서술하여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聖人)이 그 예악으로써 나라를 세웠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곧 '괴력난신(괴이, 완력, 패란, 귀신)'이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나 제왕(帝王)은 [괴력난신을] 거느리고 나라를 세웠다. 부명(符命: 명령의 징표,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운 징표)을 받고 도록(圖籙: 미래 길흉화복을 예언한 기록)을 받아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고, 그런 후에 응당 큰 변을 극복하고(이기고) 큰 그릇(넓은 기량)을 쥐고(얻어) 대업을 이루었다.
그런 까닭에 하수(河水: 황하)에서 그림(팔괘)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면서 성인(聖人)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두르는 것으로써 복희(伏羲)를 낳았고, 용이 여등(女登: 신농씨의 어머니)과 감응하여 염제(炎帝)를 낳았으며, 황아(皇娥: 소호씨의 어머니)가 궁상(窮桑)이라는 들판에서 노니는데 자신을백제(白帝)의 아들이라 칭하는 신동(神童)이 있서 교통하여 소호(少昊)를 낳았고, 간적(簡狄)은 알(卵)을 삼키고 설(契)을 낳았으며, 강원(姜嫄)은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밟고 기(充)를 낳았고, 요(堯)의 어머니는 14개월을 잉태하여 요(堯)를 낳았고,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용(龍)과 큰 연못에서 교감하여 패공(한나라 제1대 황제 유방)을 낳았다. 이로부터 뒤로도 [이런 일들이] 흘러 넘치니 어찌 모두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즉,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에 기이편을 모든 편의 첫머리에 싣는다. 이에 실로 뜻이 있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점들이 단군이야기가 담겨있는 '다솜의 시작 웅녀설화'를 '우리설화 속 다솜이야기' 부분에 싣는 이유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조에 전하는 이 '웅녀설화'가 우리나라 최초 사랑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사랑'의 기록'이라 말하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다. 물론 이 기록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와 사람이 된 '웅녀'와의 교감을 보여주는 이야기임을 고려하더라도, 기원하여 사람의 몸을 얻고 또 잉태를 간절히 원하여 매일 단수 아래에서 주원하는 '웅녀'를 어엿비 여겨(가엽게 여긴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정황상) 환웅이 인간으로 잠시 변하여 감응하여 우리의 시조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당시 '남성 우월주의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당시 곰 한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神雄), 즉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해달라 기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 먹으며 삼칠일(21일) 동안 금기했는데, (금기를 100일 동안 잘 지킨)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고로 매일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주원했다. 이에 환웅이 임시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했다."
도 4. 우허량 여신묘에서 출토된 눈동자에 푸른옥이 박혀있는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
도 5. 요하지역 적봉에서 찿은 암각화를 설명하고 있는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암각화 모습
이상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웅녀설화(단군신화)'의 전문이다.(원문은 윗부분 참조.) 내용 자체는 길지 않고 간략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이 이야기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실증사학적 입장에서 웅녀설화(단군신화) 에서의 사실성은 인정하되 고조선의 시기와 강역은 기원전 10~7세기와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와 다른 견해로 고조선의 시기를 삼국유사에 나타난 시기와 비슷하게 기원전 2400년 경이나 그 이상으로 편년하고 강역을 요하유역 일대로 보며, 이 지역의 홍산문화를 우리 한민족의 시원으로 보는 견해라 할 수있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간략히 언급했지만, 이 사안은 실로 굉장히 방대하고 민감한 부분이어서 비전공자인 필자가 이 부분을 자세히 기술하고 평가하기에는 여러가지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하기에 상세한 내용은 참고자료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주목해야할 사실은 최근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성과 등으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가 500~1000년 앞당겨 졌다는 사실과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는 점, 그리고 불과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고조선실'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웅녀설화(단군이야기)에 관하여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한국교원대학교 송호정은 개정 교과서에 대해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우리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점은 역사학계를 포함한 모든 우리 학계에서 보다 자유로운 학술 연구풍토가 고착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점에서 단국대학교 윤내현이 2003년 펴낸 그의 저서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서울: 지식산업사, 2003) 의 후기에 실은 '홀로 서기, 그러나 외롭지 않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각한다. 이 글의 전문을 이 글의 마지막에 싣는다. 일독하여 보기 바란다.
이제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시 단군영정으로 눈길을 돌리자.
정부공인 단군영정이 둘이라고?
앞서 언급한대로 우리나라 공인 단군영정은 대종교 소장 춘초 지성채 작 영정(도 2 (좌))과 홍석창 작 현정회 봉안 영정(도 2 (우))이다. 그렇다면 백련 지운영이 신라시대 화가 솔거가 그렸다 전해지는 단군 초상을 모사했다 전해지는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도 1)'과 이 그림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먼저 솔거가 단군영정을 그렸다는 기록을 찾아보자. 잘 알고있듯 솔거는 화원으로서 유일하게 정사 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三國史記卷第四十八 열전 제 8
○<率居>, <新羅>人, 所出微, 故不記其族系. 生而善畵, 嘗於<皇龍寺>壁畵老松, 體幹鱗 , 枝葉盤屈, 烏鳶燕雀, 往往望之飛入. 及到, 而落. 歲久色暗, 寺僧以丹靑補之, 烏雀不復至. 又<慶州><芬皇寺>觀音菩薩·<晉州><斷俗寺><維摩>像, 皆其筆蹟, 世傳爲神畵.
솔거는 신라인인데 출신이 미천하여 가문의 내력을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일찌기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줄기가 비늘 같았으며,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하여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가끔 멀리서 바라보고 날아들다가 벽화에 이르러서는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어 색깔이 변하자 절의 승려들이 단청으로 덧칠을 하였다. 그 후로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또한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 화상이 모두 그가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대대로 신화神畵라고 말한다.
대종교총본사大倧敎總本司 편編, 『대종교중광육십년사大倧敎重光六十年史』, (서울:대종교총본사, 1971)와 『대종교요감大倧敎要鑑』, (서울: 대종교출판사, 1993)을 살펴보면, 솔거( 率居 , ?~? )가 단군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저자가 불분명한 『동사유고東事類考』에 전한다 씌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솔거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아주 잘 그렸는데,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시골이라 그를 가르쳐 줄 스승이 없어 날마다 하늘에 계신 신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꿈속에서 단군을 만나 신기한 붓 한 자루를 받았는데, 이후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솔거는 자신을 도와준 단군이 너무나 고마워서, 꿈속에서 본 단군의 모습을 1천 점이 넘게 그렸다고 한다. 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었다는 단군천진을 기리는 글에 의하면 "영외 집집에는 한배검(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 천진을 모셨는데, 그 무렵 거의 반은 솔거의 작품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 3 중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은 이규보를 생각하면 이러한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나 이외의 기록을 살필 수 없어 아쉽다.
이 『동사유고』의 기록과 이규보가 지었다는 기록을 신뢰한다는 전제하에, 이 전하는 단군천진(초상, 영정)들의 관계를 살펴보자.
『대종교요감大倧敎要鑑』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화가 솔거가 단군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그 그림들이 당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곳에 전해져 내려왔는데 조선 말이 되면서 이 솔거의 그림들이 거의 없어졌다 한다. 그러던 중 1910?년 대종교를 창건한 나철에게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솔거의 단군 그림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며 단군 그림 한 장을 건넸다는 것이다.(사실 이 일화에 관한 것도 정확치 않다. 위키백과사전 '삼일신고' 부분을 살펴보면, 1906년 나철이 서대문역 부근에서 백전(伯佺)이라는 노인에게서 얻었다 전해지고, 다른 곳에서는 1910년 전에 일본에서 얻었다고도 전해지며, 또 다른 곳에서는 1910년 영정을 얻었다 전해져 혼란스럽다. 보다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나철은 이 그림을 백련 지운영 화백에게 모사케 하여 그해에 이 그림을 단군천진(영정)으로 봉안했다고 전한다. 이후 한일합병이 되어 대종교 지도자들이 대개 만주 등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때 이 그림을 가져갈 수 없어 당시 대종교 국내 본부 격이던 남도본사의 책임자 강우가 남몰래 자신의 부여 본가 다락방에 숨겨놓았다 전해진다. 이 그림이 그의 아들 강석기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또 그의 손자 강현기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이 그림을 전하여 받은 강현기가 이 영정을 국립부여박물관에 기탁하여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면 왜 이 지운영 작 단군영정이 대종교 단군천진으로 계속 봉안되지 않고 바뀌게 된 것일까? 8·15해방 후 1946년 대종교 제3대 교주인 유세복 등이 환국해 이 단군그림을 찾아 살펴보니 변색된 부분이 있어 지운영 화백의 아들인 춘초 지성채 화백에게 새롭게 모사케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이 모사품이 현재 대종교 측에서 보관하고 전해지고 있는 단군그림(그림 2 (좌))이다. 그 후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가 1949년에 국회의 동의를 받아 이 영정을 대한민국 국조표준본으로 공인했다.
지운영 작으로 전해지는 단군영정과 지성채 작 단군초상, 두 그림을 살펴보면 화풍이나 세부적인 묘사가 거의 흡사하다. 이러한 점이 전 지운영 작 단군영정을 지성채가 모사하였다는 일화에 사실성을 더해준다. 다만 후에 지성채에 의하여 모사된 영정은 단군의 머리 뒤에 후광(halo) 표현을 더하여 종교적인 색채를 더하였다. 이 점을 제외하면, 부친 지운영의 단군영정을 충실히 모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품격은 부친의 것에 조금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을 종합하면, 신라 솔거의 단군 그림이 1910?년 지백련 화백에 의해 모사됐고 해방 직후 그 아들인 지성채 화백에 의해 다시 모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러한 전해지는 내용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이들이기 전에 이러한 내용들이 전하는 사료들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러면 왜 이 공인 단군영정 외에 1977년 홍석창에 의해 그려지고 이듬해 공인을 받은 다른 하나의 단군영정이 생긴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지성채에 의하여 그려진 영정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정부의 공식적인 행사에 어울리지 않고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인 색채를 줄이고 보다 친근한 모습의 현정회 표준영정을 공인했다는 것이다. 일견 수긍이 간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앞서 제안하신 분들의 의견처럼, 영정의 단일화 작업을 함께 모색함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학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논문이나 연구 저서를 출간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잘못 전해왔던 것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바로 동조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오한 연구결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발표자가 그러한 결과를 내놓기까지는 깊고 오랜 연구를 거쳤기 때문에 그 결과에 동의하려면 그 발표자 정도의 이해 수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한 뒤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연구를 많이 하는 학자일수록 홀로 서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학자는 외롭다. 심오한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학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를 안아주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라도 그것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난의 성격을 지녀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역사 연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사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풍토가 아쉽다. 새로운 주장을 받아주는 아량이 부족하다. 학문을 벗어난 공격, 심지어는 인신 공격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학교 입장이 난처하다면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면서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그 뒤 어느 정보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다 기억하는 바와 같이 1980년대는 그러한 곳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시대였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곤란하다면서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본 것은 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선생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필자가 제기한 견해는 중국 고대 문헌을 검토하면서 얻어낸 것으로써 고조선의 영토를 넓게 본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일치한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역사 연구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므로 그것이 사실과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과 일치한 연구결과는 모두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필자가 우리 고대사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을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로 분류하고 필자를 재야사학자에 포함시켰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주장은 비정통 역사학자의 주장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뜻을 담은 것 같다. 학문 연구를 하는데 강단과 재야라는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러한 구분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도 했으며 현직이 대학교수인데 필자를 강단사학자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 필자가 일부 사학자들을 식민사관을 가진 학자라고 비난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기도 했다. 필자는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글을 쓴 적이 없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남을 칭찬은 하지만, 비방이나 비난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 쓰는 것도 삼간다. 올바른 서평을 쓰려면 비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직 필자가 할 일만 충실하게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의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모두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독재정권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정권유지에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리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 모두 독재정권에 협력한 것인가. 역사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 중요성은 정권과 상관없이 강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모함을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고대사 학자들을 민주화에 역행한 사람들인 것처럼 매도하여 새로운 고대사 연구나 그 결과에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으로 말하면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단체한테서 연구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아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즈음은 우리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 또는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면 세계화의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도에 필자는 한번도 변명을 하거나 반박을 해본 적이 없다. 묵묵히 연구생활에만 정진하면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필자의 주장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필자가 그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첫째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내 자신이 남을 모함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를 비방하거나 공격한 학자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필자가 고조선을 포함한 우리 고대사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기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 고대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지난날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침묵만을 지켜왔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서 필자가 새로운 주장을 한 뒤에야 그대들도 기존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의 고대사 내용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지금 필자는 외롭지 않다.
그 동안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필자를 매도했던 학자들까지도 요즘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넓게 보고 있으며 그 문화 수준도 지난날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필자가 이렇게 그 동안의 사정을 밝히는 것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필자의 체험으로 알림으로써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해주자는 뜻에서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에서이다.
그래야만 우리 겨레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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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1. 비나이다 비나이다_다솜의 시작 웅녀설화 (0) | 2009.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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