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솜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워 두고(2)

Moam Collection 2009. 12. 20. 08:00

선화공주 설화 정말 사실이 아닐까?

  

 도 1. 익산 미륵사 서탑에서 발견 된 사리장엄(좌)과 사리장엄 중 「금제사리봉안기」(우)

 

지난 2009년 1월 14일 익산 미륵사지에서 우리 역사상 기념비적 유물이 출토되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미륵사지 서탑을 보수·정비중에 심주心柱 윗부분上面 중앙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 금제사리 봉안기金製奉安記, 도자(칼), 금제방편, 은제관식 등을 포함한 사리장엄舍利莊嚴이 발견된 것이다. 이 귀중한 유물들의 출토로 한층 고무되었던 흥분이 채 가라앉기 전, 사리장엄 중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앞서 살펴 본『삼국유사』'선화공주 설화'에 관한 허구성을 지적하는 글들이 이곳 저곳에서 흘러나왔다. 먼저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앞면)竊以法王出世隨機赴感應物現身如水中月是以託生王宮示滅雙樹遺形八斛利益三千遂使光曜五色行遶七遍神通變化不可思議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種善因於曠劫受勝報於今生撫育萬民棟梁三寶故能謹捨淨財造立伽藍以己亥  
(뒷면)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願使世世供養劫劫無盡用此善根仰資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寶曆共地同久上弘正法下化蒼生又願王后卽身心同水鏡照法界而恒明身若金剛等虛空而不滅七世久遠并蒙福利凡是有心俱成佛道

 

가만히 법왕法王(부처님)으로(서) 세상에 나시어 기(불교: 심기, 근기)를 따라 다다라 감응하시어 사물에 몸을 드러내심이 물속의 달과 같다. 이것이 왕궁에 의탁하여 나셔서 8곡의 사리를 남기며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심을 보이면서 삼천(모든 만물)을 이롭게 하셨다. 곧 빛이 비추어지니 오색으로 7번을 돌며 빛나는 신통변화가 불가사의하다.

우리 백제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은 광겁(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선행)을 심어(쌓아) 승보(넘치는 보답)를 받아 금생에 만민, 동량, 삼보(불보, 법보, 승보)를 어루만져 기르셨다. 고로 능히 삼가 정재를 희사하여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맞아 받듦으로써 가람伽藍을 만들어 세우셨다. 원하옵건데, 세세토록 공양하고 겁겁이(영원토록) 다함이 없이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연수(수명)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보력(임금의 나이)은 땅과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 곧 자신의 마음은 수경水鏡(사심없는 깨끗한 마음, 인격)과 같아서 볍계를 비추고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같이 칠세七世오래도록 불멸하시어 아울러 복리를 입게 하시고, 무룻 이 유심한(주의 깊은) 갗춤이(으로) 불도(부처의 가르침. 불과에 이르는 길)에 이르게 하소서."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위 '사리봉안기'의 내용처럼 '유심한 갗춤'으로 각종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되었고, 가공기법 또한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대향로와 비견될 정도의 정교미와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어 뛰어난 국보급 유물의 진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중 '금제사리봉안기'는 그 외형적 아름다움 이외에 1400년 동안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던 '미륵사彌勒寺' 가람과 탑의 조성시기, 조성목적, 또 창건주체 등을 명확히 보여주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어 그 귀중함이 더하다 할 수 있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그 주된 내용은 대왕폐하와 왕실의 영원한 안녕을 기원하며 백제 왕후(사택적덕의 따님)가 재물을 희사해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하며 가람伽藍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사리봉안기'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에 걸쳐 99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도 11행에 걸쳐 모두 94글자가 적혀 있다. 
 

위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을 따르자면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믿어왔던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 사택적덕의 따님'이 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다면 일연선사의 『삼국유사』기록이 허구란 말인가?

 

앞서 살펴보고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고대사 영역은 많은 풀어야 할 과제들을 가지고 있고 불확실한 내용이 적지 않다 할 수 있다. 이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에 관한 내용도 남아있는 유물과 사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확실한 고증이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사실에 기반을 둔 상상력의 필요, 이러한 점이 고대사 연구의 매력이자 동시에 어려움이다. 현재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는 '선화공주 설화'에 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의 내용을 더욱 비중있는 역사적 사료로 보고 그 내용을 근거로[사실 '사리봉안기'의 해제와 그 의미에 관하여 좀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생각된다.] '미륵사' 창건주체를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보는 경우와 '사리봉안기'의 내용을 중시 하면서도 그 내용이 『삼국유사』의 '선화공주 설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선화공주 설화'는 아직 유효하다고 보는 견해를 들 수 있다. 먼저 필자의 견해를 밝히자면 후자 의견인 '선화공주 설화'는 유효하며 사실이다라는 쪽에 그 무게를 실어주고 싶다. 자, 이제 주어진 단서들을 토대로 '선화공주 설화'를 다시 살펴보자.

 

도 2. 『일본서기』 표지와 『일본서기』 중 부분 

 

『삼국유사』「무왕조」에 실려 있는 '선화공주 설화'의 사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많은 분들이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4』「황극기皇極紀 원년元年」 2月 기사와 7月기사 등을 참조하여 무왕의 장자이자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 ?~660)'의 집권과정(의자왕 정변)을 통하여 그(의자왕)의 출생[무왕 재위 전 익산지역에서 선화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子]을 추론하였고 필자 또한 이 견해가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 『일본서기』는 그 기록의 정확성에 있어 적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어서 어느 정도까지 그 기록 내용을 믿을 수 있을지에는 의문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한 추론 과정과 내용은 '참고자료' 부분을 살펴 주기 바란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미륵사지 출토유물'에 관한 학회가 열렸다. 그 자료문들을 참조하면 '사리봉안기'를 포함한 미륵사지 출토유물과 그 의견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한 곳으로 '동국사학회 자료실'의 참조를 바란다. http://dongguk.koreanhistory.or.kr]

 

이 기록에 더하여 『삼국유사』「법왕조」중 마지막 찬 부분의 기록은 유의 할 만하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중략) 與古記所載小異. 武王是貧母與池龍通交而所生. 小名薯蕷. 卽位後諡號武王. 初與王妃草創也."

"(중략) 『고기古記』에 실려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은 여기에 가난한 어머니가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낳은 이로, 어릴 때 이름은 서여, 즉위한 뒤에 시호를 무왕이라 했다.  이 절은 처음 왕비와 함께 이룩한 것이다." 

 

내용 중 "이 절은 처음 왕비와 함께 이룩한 것이다." 부분으로 미루어 보면, 첫 왕비는 시작은 함께했지만 그 마지막은 함께하지 못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선화공주와 무왕의 로맨스가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나타난 '사택적덕 따님'에 의하여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필요는 없다 할 수 있다. 『삼국유사』「법왕조」의 이 기록을 토대로 이러한 추론을 하는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또한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들로 당시의 상황을 하나하나 구성하여 보자.

 

모든 나라의 역사(정치사) 부분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백제의 역사는 왕권과 귀족세력 간의 치열한 세력다툼을 백제사를 이해하는 큰 한 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배경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건데 강한 왕권의 확립으로 여러 귀족세력 힘의 균형을 맞추었을때 그 나라는 부강했으며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무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왕권과 귀족세력의 관계를 살펴보면, 어떻게 익산 지역에서 마를 캐며 살던, 그것도 신라 공주인 선화와 혼인한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 궁금증과 백제사의 많은 풀리지 않았던 부분이 자연스레 풀린다. 당시 왕과 귀족간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도 3. 사택지적비

 

신라 이찬비지의 딸을 비로 맞이한 사실(493)로 잘 알려져 있는 백제 제 24대 동성왕이 왕권강화를 위하여 신진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던중 비대해진 신진 귀족세력에 의하여 시해 당하였고[동성왕은 501년 신진귀족 백가苩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시해되었다.], 뒤 이은 제 25대 무령왕은 다시 구 귀족세력을 등용하여 힘의 균형을 맞추고 22담로에 왕족을 보내어 왕권을 강화하는 등 제도를 개편하였고, 이에 '웅진'으로 천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힘쓴다. 이를 기반으로 무령왕을 계승한 제 26대 성왕은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대외적으로 활발한 정복활동과 외교활동을 펼치며, 수도를 '사비'로 옮겨 더욱 왕권을 강화한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강성한 고구려에 함께 대처하는 과정에서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유역을 신라가 배신하여 차지한 것에 분개한 성왕은 아들 여창(위덕왕)과 함께,극렬한 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신라를 치러 출병하였으나 신라 장수 무력에게 관산성에서 대패하고 성왕 자신은 전사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제 왕권은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에 위덕왕을 이은 혜왕과 법왕의 재위 기간이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는 이유를 왕권과 귀족간의 세력다툼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그러한 가능성도 배제 할 수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백제 귀족들은 신라 등의 다른 나라들과의 싸움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전쟁 등으로 인한 자신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전쟁 등으로 인한 혼란없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며 편안히 안주하고픈 것이 주된 이유 중 하나였을거라 생각한다. 이러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법왕 사후, 다음 왕의 재위를 고민하던 귀족들에게 익산 지역에서 마를 캐며 살아가던 더욱이 신라 공주 선화와 혼인한 몰락한 왕족 '서동'은 귀족이 바라는 왕의 모든 조건을 갗춘 완벽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서동은 백제 제 30대 무왕(600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왕권에 오른 무왕은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가장 강성한 귀족 가문이었던 사탁씨(사씨)의 여식을 비로 맞이하여 점차 왕권강화를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도 3. 사택지적비 참조; http://blog.naver.com/yl1ca/80096695510). 이 과정에서 선비 '선화공주'와 그 자 '의자'의 고충은 매우 컸으리라 생각한다. 서동이 왕이되어 사비의 궁으로 들어갈때 선화와 의자가 함께 입궐하였을지도 의문이 간다.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무왕은 사비성 일대에 거주하던 귀족세력 견제의 필요성을 익히 알았을 것이다. 이 귀족세력의 견제를 위하여 무왕이 꺼낸 카드가 익산 지역의 귀족(호족)세력이었고 미륵사를 비롯한 제석사, 왕궁사, 왕궁건립 등 익산으로의 천도계획은 자연스럽게 선화공주와 의자에 의하여 주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미루어 생각해보면, 삼국유사 법왕조와 무왕조의 기록에 나타난 '미륵사'와 '왕흥사' 명칭에 관한 의문도 이해가 간다.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중략)여기에 미륵법상 세 개와 회전會殿, 탑塔,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중략)"  

"(중략)이듬해 경신(600)에 30명의 도승(득도한 중 혹은 관에서 도첩을 얻은 중 )을 두고 당시 서울인 사비성(지금의 부여)에 왕흥사를 세우려고 겨우 터를 닦고 죽었다. 무왕이 왕업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기틀을 닦고 아들이 지어 수기가 지나 완성하니 그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중략)" 

 

이 기록들에 의하면 무왕의 부친 법왕이 터를 닦다 서거하고 선대의 유지를 이어 사찰을 무왕이 완성했다. 따라서 이 사비의 왕궁사찰의 명칭은 '왕흥사 혹은 미륵사'라 불리우게 되었다. 익산 지방은 무왕이 천도를 계획했던 곳이자 최소한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지역이다. 이러한 곳에 현 수도인 사비와 같은 사찰을 세우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더우기 왕흥사는 선왕의 유지를 이은 가람이었다. 따라서 익산의 미륵사도 '왕흥사'라 불리우게 된 것은 아닐까?

 

어쨌던 이러한 천도를 위한 준비과정 중에 사탁씨를 비롯한 귀족 세력의 견제 등으로 '선화공주'는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고, 이에 미륵사 서탑에 봉안된 사리장엄 중 '사리봉안기'에 창건주체로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 의 딸'이 기록되어 있게 된 것이다.[의자왕의 등극과정은 이 곳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 고리타분한 역사고증에 관한 부분은 덮고 다시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랑이야기로 시선을 돌리자.

 

무왕과 선화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

무왕이 익산지역에서 서동으로 지내던 시절,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따님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라는 말을듣고 경주로 가 '서동요'를 퍼뜨려 공주를 곤경에 빠뜨리게 되었고, 이에 궐을 떠나게 만들어 공주를 취했다는 부분은 앞서 언급했듯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그 어떤 술수를 부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 과정이야 어떠했듯 결과만 좋으면 된다? 물론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의 경우라면 거짓과 술수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고 싶지는 않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서동이 왕이 된 후의 '선화공주'의 어려움, 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무왕,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화공주와의 소생인 '의자'를 세자로 책봉한 일. 궁을 떠나 익산 지역에 머물다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힌 선화공주를 따라 익산에 묻혔는지, 먼저 세상을 등진 선화공주의 능이 부여 근방에 있었으나 무왕의 유언으로 의자왕에 의하여 익산 지방에 함께 '쌍릉'으로 묻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둘의 국경을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끊임없이 후대의 젊은이들에게 회자 될 것이다.[다시 한 번 도굴의 폐혜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서동이 왕이 되지않고 익산에서 선화공주와 아름다운 사랑을 가꾸며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면 그것이 더욱 좋지 않았을까? 귓가에 아이들의 외침이 낭랑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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