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초월한 사랑
도 1. 「서동요薯童謠」, 『삼국유사 권2 』「무왕武王」조條 중
우리 역사 중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야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가야 수로왕과 허황옥공주, 고구려 유리왕과 치히, 고구려 동성왕과 신라왕족 비지의 딸, 그리고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 등등 많은 경우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 중『삼국유사 』에 고구려 무왕(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서동요'와 더불어 잘 알려져 있는 '선화공주 설화(서동설화)'이다. 이 이야기가 그저 설화'일 뿐일까? 내용을 되짚어 찬찬히 살펴보자.
서동요, 선화공주 설화
『삼국유사 권2 』「무왕武王」조條에 의하면,
"武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 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 常掘薯 .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 餉閭里群童. 郡童親附之. 乃作謠. 誘群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王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薯童曰可. 於是聚金. 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也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 殿塔廊 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王與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무왕(옛 책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이병도는 진평왕과 무왕 때의 신라·백제 두 나라의 관계는 원수 사이이므로, 이같은 혼인이 성립될 수 없으며, 이는 어쩌면 493년에 있었던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 비지(比智)의 딸과의 통혼사실을 가지고 만들어진 설화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그 어머니가 홀로(과부) 되어 경사(서울: 사비성)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교통하여 (장을) 낳았는데,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이로 인해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선화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경사(서울: 경주)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주어 마을 아이들과 붙어 친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童謠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힘껏(매우 혹독히)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하는데 왕후王后가 순금純金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장차 찬소(숨어지낼 곳,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며 모시고 가겠다 하였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 우연을 믿고 기뻐했다. 인하여 그를 따라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母后가 준 금을 내어 놓고 장차 살아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하였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진흙과 함께 버려져 쌓여 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니,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이 보물을) 부모님의 궁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하기를, "좋소."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였으므로, 용화산龍華山(지금 익산의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 금과 함께 사자사師子寺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동안에 금을 신라 궁중으로 날라 보냈다. 진평왕眞平王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하였고, 항상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굳은 소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법상 세 개와 회전會殿, 탑塔,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 진평왕이 백공(온갖 장인)을 보내어 이를 도왔는데, 지금 그 절이 남아 있다(『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이는 법왕法王의 아들이다'라 했는데, 이 전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도 2. 관세음응험기 목판 (원본은 '두루말이' 형태로 일본 교토 청련원 소장)
그리 길지 않은 기록이지만 살펴야 할 내용이 사실 상당하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무왕'이라 제하고 찬(자신의 견해)을 그 옆에 적어 놓는다. "옛 책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이러한 기록으로 이병도는 '무강武康'이 '무녕武寧'의 같은 뜻 다른 표기라 하여 '무녕왕'을 말하는 듯하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에 의하여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교토 청련원 소장, 10c 경)’(도 2)를 보면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적혀 있는데 그 부분을 살펴보면,
‘(중략)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 (중략)’
“(중략)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새로 경영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639)이었다.(중략)"
이 기록에서 무왕을 '무광왕'이라 적고 있다. '관세음응험기' 내의 이 기록이 어떤 사료들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어 아쉽지만, 여기에 나타난 '무광왕'을 유사의 '무강왕' 표기의 이형(다른 형태)으로 볼 수 있다. 또, 조선 중종 대에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신공제申公濟·홍언필洪彦弼·이사균李思鈞 등에 의하여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 후기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에 의하여 편찬된 『대동지지』「익산」조에 무왕의 명칭을 '무강왕武康王'이라 한 점은 유의 할 만 하다.
도 3. 부여융묘지명, 중국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소장
다음으로 무왕의 출생에 관하여 알아보자. 무왕의 어머니는 경사(서울: 사비성) 남쪽 못가에 살던 과부였다. 그는 '못의 룡'의 씨를 받아 태어 났다. 못의 룡? 이 문구가 의미하는 바가 궁금하다. 사실 무왕의 출생에 관하여 지금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고 다만 몇 가지 추측이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설 중 하나로 서동(무왕)을 당시 익산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몰락한 왕족으로 보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선대 혜왕과 법왕 모두 1년 남짓한 재위 후 사망하여 급하게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이 지지기반이 약한 몰락한 왕족인 서동을 왕으로 세웠다는 가정이다. 두 번째, 서동을 익산 지역에 지지기반을 둔 호족(귀족)으로 보는 경우이다. 익산지역에서 이룩한 막대한 부와 강력한 지지기반을 토대로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설이다. 다음, 서동(무왕)을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법왕의 아들로 보는 경우이다. 개인적으로 이 가정이 가장 끌리는데, 이 가정 역시 풀어야할 문제가 있다. 먼저『삼국사기』[삼국사기 권 제이십칠 백제본기 제오]의 내용을 살펴보면,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라 무왕의 출생신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법왕은 혜왕惠王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이라 했다. 혜왕은 성왕의 차자로 그 형 위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법왕은 그 아버지 혜왕과 마찬가지로 재위기간이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가계를 정리하여 보면, 무왕은 성왕의 손자이고 위덕왕의 조카로 왕실의 지친至親이었다. 따라서 '못의 룡'은 왕성 주변 못가에 사는 왕족을 이름이다. 하지만 무왕(당시 서동)이 마를 캐서 이것을 팔아 생업으로 삼았다는 기사 그리고 익산 지역에 멀리 떨어져 생활한 점 등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비정상적 결합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무왕'의 상황을 짐작 할 수 있는데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아쉽다. 이 가정의 경우 서동(무왕)의 모가 룡과 통하여 서동을 낳았다 전해지는 익산 '마룡지馬龍池'와 상충된다. '마룡지'와 '서동모의 집터'에 관한 기록이『(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 33卷 三十三 』「익산군 산천」조 '마룡지馬龍池')와 『대동지지』「익산」조에 남아 있다. 또, 1920년 중국 낙양시에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묘지명'(도 3)이 출토되었는데, 그 기록에 '법왕'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학계 일각에서는 '법왕'의 존재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의심도 하고 있다.[대부분의 묘지명에서 가계를 설명함에 있어 증조부를 기록함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앞으로 나올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와 문헌사적 연구에 주의를 기울이며 무리가 없는 첫번째 가정인 무왕을 '익산지역에서 태어난 몰락한 왕족'으로 보는것이 타당하다 생각된다. 이 외에 역성혁명을 통한 왕위계승 등등 여러 가정이 있으나 모두 적지 않는다. 사실 무왕의 출생에 관한 불확실 뿐 아니라 '선화공주'의 존재 자체에 관한 의문 등도 있으나 일일이 적지 않는다. 무왕과 선화공주 뿐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우리 고대사 부분은 많은 풀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한 나라의 역사서가 쉽게 또한 가볍게 쓰여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우리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여야 하지만, 이보다 100여 년 후에 쓰여진 『삼국유사』에서 저자 일연도 수 많은 이 전 기록들을 살핌에 『삼국사기』의 이 기록이 미심쩍었던지 마지막에 찬을 더한다.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이는 법왕法王의 아들이다'라 했는데, 이 전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이제 '선화공주 설화' 이야기가 이어진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경사(경주)로 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서로 친해져 '서동요'를 지어 부르게 했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당시 승려들은 신라와 백제 사이를 오가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신라 고승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의 유학을 고구려를 통하여 가려 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승려들은 삼국을 오가는데 어느 정도 자유가 있었음을 알 수있는데, 이에 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된다. 음란한 내용의 '서동요'가 널리퍼져 백성, 관리, 결국에는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이에 백간이 극렬하게 선화공주를 멀리 보내기를 간하여 공주는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 왕후는 이러한 딸이 안쓰러워 순금 한 말을 주며 이내 딸을 떠나 보낸다. 찬소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 서동이 나타나 공주를 모시겠다 자청하는데, 공주는 첫 눈에 서동에게 호감을 느낀 듯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는 그를 따라 나서게 되고 또 몸을 허락하게 된다. 연후, 그의 이름이 '서동'인 것을 알게 되었고 이내 그 동요의 '영험'에 놀라며, 서동과의 만남을 '운명'이라 믿는다. 이 대목은 개인적으로 영 마땅치 않다. 서동이 술수로 선화공주를 어려움에 몰아 얻었다는 부분도 마음에 들지 않고, 일국의 공주가 근본도, 심지어 그 이름도, 모르는 사내와 눈이 맞아 정을 통한다? 이러한 만남이 결혼으로 이어졌기에 망정이지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것은 요즈음 흔히 말하는 '원 나잇 스탠드'가 아닌가? 이러한 내용으로 이야기가 끝이 났다면, 물론 이 이야기가 전하기도 힘들었겠지만, 이 설화는 결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될 수 없다. 설화 이야기를 이어가자.
함께 백제에 이르러 진흙 속의 금을 크게 모아 이를 지명법사의 신력을 통하여 신라 궁궐 안 으로 보내고, 이에 진평왕은 그 신기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서동은 민심을 얻어 결국 아버지 법왕을 이어 왕이 되었다. 금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는 서동을 이해하기 힘들고, 크게 모은 금을 신력으로 신라 진평왕에게 보내고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말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서동은 백제로 돌아온 뒤 금을모아 큰 부를 축적하였음을 생각 할 수 있고 또 지명법사라는 고승이 그를 후원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지금도 그 양은 많이 줄었지만 익산 미륵사 주변(김제 지역)에서 사금을 채취한다. 즉, 서동은 거대한 부와 고승 등 익산 지지세력의 후원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생각된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의 존재는 서동이 왕위에 오르는데 득이었을까? 사실 이 부분이 좀 모호하다. 막대한 금을 진평왕에게 보냈다는 점을 보면 정략적 결혼의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확실하지 않다. 필자의 생각으로 서동이 설화의 내용대로 선화공주의 아름다움때문에 공주를 배필로 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신라 공주와의 혼인은, 제 삼자 입장에서 보면, 득보다 실이 더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에 관한 설명은 뒤로 미루자. 서동이 왕으로 즉위한 후 수차례(재위 42년간 12차례)에 걸친 신라와의 전투를 벌인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삼국유사』의 이 기록을 신뢰한다는 전제하에 생각해 보면, 선화공주는 말할 것도 없고, 무왕 자신과 또 사위와 치열한 전투를 해야만 하는 진평왕의 마음 모두 괴로웠을거라 생각된다.
도 4. 미륵사지 배치 도면
이어 미륵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위 기록에 따르면, 익산(용화산) 미륵사 창건계기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자사로의 여정 중 용화산가 연못에서의 미륵삼존의 출현과 이에 따른 선화공주의 바람이라 할 수 있다. 가람(미륵사)의 창건을 위해 다시 한 번 고승 지명법사의 신력을 빌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고 미륵사를 세웠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미륵사에서 조금 떨어진 '사자암' 주변에서 '사자사'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기와의 출토로 '사자사'의 존재가 확인 되었고, 미륵사지 발굴과정에서 뻘층과 무려 47단까지 다져진 판축의 확인으로 가람의 터가 못이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백제의 주류 가람배치인 일탑일금당식이 아닌 각각 회랑을 두른 삼탑삼금당식임이 증명되어 『삼국유사』 위 기록의 정확성을 보여준다.(도 4 참조)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는 기록이 혼란을 가져온다. 『삼국사기』「무왕 35년」조의 기록에 "2월에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기록되어 있어, 이 『국사』는 『삼국사기』를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연이 '미륵사'와 '왕흥사'를 동일한 사찰로 본 것에 의한 오기로 보여진다. 그러나, 『삼국유사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法王禁殺」조를 살펴보면,
"法王禁殺
百濟第二十九法王諱宣. 或云孝順. 開皇十年己未卽位. 是年冬. 下詔禁殺生. 放民家所養鷹 之類. 焚漁獵之具. 一切禁止. 明年庚申. 度僧三十人. 創王興寺於時都泗沘城.(今扶餘.) 始立栽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歷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 附山臨水. 花木秀麗. 四時之美具焉. 王每命舟. 沿河入寺. 賞其形勝壯麗.(與古記所載小異. 武王是貧母與池龍通交而所生. 小名薯蕷. 卽位後諡號武王. 初與王妃草創也.)
법왕금살
백제 제 29대 법왕의 이름은 선이며 효순이라고도 한다. 개황 10년 기미(599)에 즉위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나 새 따위를 놓아주게 하고 또 (물)고기 잡는 기구를 불태워 일절 금지시켰다. 이듬해 경신(600)에 30명의 도승(득도한 중 혹은 관에서 도첩을 얻은 중 )을 두고 당시 서울인 사비성(지금의 부여)에 왕흥사를 세우려고 겨우 터를 닦고 죽었다. 무왕이 왕업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기틀을 닦고 아들이 지어 수기가 지나 완성하니 그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화목이 수려하여 사시의 아름다운 경치를 갖추었기에 왕은 항상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절에 들어가 그 장엄하고 수려한 형상(경치)를 구경했다(『고기古記』에 실려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은 여기에 가난한 어머니가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낳은 이로, 어릴 때 이름은 서여, 즉위한 뒤에 시호를 무왕이라 했다. 이 절은 처음 왕비와 함께 이룩한 것이다).
도 5. 왕흥사 사리장치와 청동합 명문탁본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미륵사'와 '왕흥사'가 동일한 사찰의 명칭으로 혼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략) 그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당시 백제에 '미륵사'란 사찰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발굴조사 중인 부여 왕흥사의 목탑지에서 발견된 사리장치 중 청동합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昌王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본사를 세우고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명문(도 5)이 발견되어 혼란이 가중된다. 부여 지역에 또 다른 '왕흥사'란 사찰이 있었는지 아니면 위 청동합 명문의 기록대로 위덕왕(창)이 지은 것을 혜왕(『삼국유사』「왕력」편을 보면, 혜왕을 '위덕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에 혜왕은 위덕왕의 동생이라 기록되어 있어 일연의 오기로 보인다.)을 지나 위덕왕의 조카이자 무왕의 아버지 법왕이 규모를 더욱 키워 창건하기 위하여 터를 닦다 사망하고, 무왕이 부친의 왕업을 계승하여 완공하게 된 것인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어 아쉽다. 또한 신라 진평왕이 백공(온갖 장인)을 보내 미륵사 창건을 도왔다는 기록은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믿기 힘들지만, 진평왕의 입장에서 오해로 멀리 떠나보낸 딸의 청원으로 지어지는 '미륵사'를 위한 요즘으로 말하자면 '인도적 차원의 지원' 정도로 해석하면 불가능 할 것도 없다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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