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Moam Collection 2010. 3. 9. 09:26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嵓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潛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迴德等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置也. 下例知.) 三曰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西村屬焉. 四曰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 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金山加里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 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 六曰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 勿伊村仍仇旀村闕谷(一作葛谷)等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盍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時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撿之. 有一紫卵.(一 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盖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乃至雞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 自稱云. 閼智居西干一起.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君配之. 是日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 有雞龍現而左脇誕生童女.(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之.) 姿容殊麗. 然而唇似雞觜.) 將浴於月城北川. 其觜撥落. 因名其川曰撥川.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雞井. 故或云雞林國以其雞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得金閼智. 而雞鳴於林中. 乃改國號爲雞林. 後世遂定新羅之號.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진한辰韓 땅에는 예로부터 여섯 마을(村)이 있었다. 첫째(마을)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며,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라고 한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瓢암峰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알평)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설치하고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으로,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 한다. 처음 형산兄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 읽어야 하며 간혹 탁으로 쓰는데 역시 음은 도道이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이라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며,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으로,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쓴다)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양梁은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觜山珍支村; 빈지賓之, 빈자貧子, 빙지冰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라 한다.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崔致遠은 이 본피부本彼部 사람으로, 지금의 황룡사黃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산)으로 촌장村長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라고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내아兒等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여섯 부部의 시조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 하다. 노례왕弩禮王 9년(132)에 처음으로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쳤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기원전 69) 임자(壬子;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그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우리들은 위에 군림하여 백성을 다스려 갈 군주가 없기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떨겠는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옆에 번개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우고 백마 한 마리가 땅에 꿇어 앉아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하고(혁거세왕赫居世王, 이는 필경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가들에 따르면,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겄이다.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는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에 계룡계龍이 상서祥瑞러움을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 역시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나타났음)을 뜻함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 위호(位號)는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하였다(居瑟邯, 또는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말하기를,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고 하였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 후부터 왕王의 존칭이 되었다)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왕후(王后)를 찾아 짝을 맺어드려야 한다".

그날 사량리(沙梁里)에 알영정(閼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 함)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혹은 용龍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도 한다). 얼굴과 용모(모습)는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입부리와 같았다. 월성(月城) 북천(북쪽에 있는 냇물)에서 목욕을 시키자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으므로 그 시내의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이다)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아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의 모양이 박[匏]과 같았다. 향인(鄕人)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姓)을 박(朴)이라 하였다. 여자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聖人)이 나이 13세가 되는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전 57)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아이를 왕후(王后)로 삼았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國號)를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였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新羅)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도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王后)도(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이 한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하였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오체五體)를 제각기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었다. 이것을 사릉(蛇陵)이라도 한다. 담엄사(曇嚴寺) 북쪽의 능(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太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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