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위만조선 魏滿朝鮮

Moam Collection 2010. 1. 5. 00:48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常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燕)因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邊. 漢興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 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在樂浪郡浿水之東.)以兵威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馭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之部都尉. 朝鮮怨何. 襲攻殺何. 天子遣樓舡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筍 出遼. 討右渠. 右渠發兵距 . 樓舡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舡軍小. 卽出擊樓舡. 樓舡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舡亦往會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其軍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啖(師古曰. 尼谿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 路人, 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四郡.

 

위만조선 

『전한서』의 「조선전」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맨 처음 연나라 때부터 진번·조선(안사고는 말하기를, 전국 시대에 연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을 침략해서 이를 차지하고, 관리들을 두어 변방의 요새를 쌓았다.  그 뒤에 진이 연을 멸망시키자 이 땅을 요동군 변방에 소속시켰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 지킬 수 없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해서 쌓고 패수로 경계를 삼아(안사고는 말하기를,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고 했다)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연나라 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게로 들어가니, 연나라 사람 위만은 망명해서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요동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를 건넜다.  여기에서 진나라의 옛 빈 터전인 상하의 변방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차츰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또 옛날에 연과 제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이기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했다.  위만은 군사의 위력으로 그 이웃의 조그만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과 임둔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안사고는 말하기를, 위만의 손자 이름이 우거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과 진국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안사고는 말하기를, 진국은 진한이라고 했다).  원봉 2년에 한나라에서는 섭하를 보내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섭하는 그곳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말을 모으는 구종을 시켜서 자기를 호송하러 온 조선의 비왕 장(안사고는 말하기를, 장은 섭하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곧 패수를 건너 달려서 변경 요새를 넘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한나라 천자는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의 동부 도위를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불의에 그를 쳐 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서 제에서 배를 타고 발해로 건너가 조선을 치게 하니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 순체는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를 쳤다.  우거는 지세가 험한 곳에 군사를 내어 그를 막았다.  누선장군은 제의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이때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정탐해서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 속으로 도망해서 죽음을 면했다.  좌장군 순체도 조선의 패수 서쪽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천자는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형세가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위산을 시켜 군병의 위력을 가지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는 항복하기를 청하고 태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1만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인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일렀다.  '이미 항복한 터이니 병기는 가지고 오지 마시오.'  태자도 사자인 위산이 혹 자기를 속여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여 마침내는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목베었다.  좌장군은 패수 상류에 있는 조선 군사를 깨뜨리고 바로 전진하여 왕검성 밑에까지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역시 왕검성 밑으로 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했다.  우거가 굳게 성을 지켜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천자는 이 싸움이 오래 되어도 끝이 나지 않자 옛날 제남태수 공손수를 시켜서 치게 하고, 모든 일을 편의에 의해서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는 우선 누선장군을 묶어 놓고 그 군사를 합쳐서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상 노인과 한도와 또 이계의 상 삼과 장군 왕협(안사고는 말하기를, 이계는 지명으로 이들은 모두 네 명이라고 했다)은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왕은 이 말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와 왕협, 노인은 모두 도망해서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 3년 여름에 이계의 상 삼은 사람들을 시켜서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거의 대신인 성기가 또 자기 나라를 배반했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자기들의 백성을 타이르고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의 네 군으로 삼았다.

 

<참고자료>

일연(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서울: 을유문화사, 2002) 
일연(이동환 역주), 『삼국유사(상)』, (서울(경기): 삼중당, 1993)
일연(이동환 역주), 『삼국유사(하)』, (서울(경기): 삼중당,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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