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논고는 출판예정된 것으로 무단이용시 법적제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I. 서序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은 기미년己未年 (영조 15년, 1739) 여름 조선시대 문인들인 조치회趙稚晦1), 송원직宋元直2), 서국보徐國寶3), 심시서沈時瑞4), 조군수趙君受5), 정선鄭敾6), 이병연李秉淵7) 8인人8)이 당시 도승지都承旨 (지신사知奏事)로 있던 이춘제李春躋 (1692~1761)의 집 후원 서원西園과 그 정자인 서원소정西園小亭에서 모여 가졌던 가회嘉會9)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시화첩詩畵帖이라 할 수 있다. 이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의 귀중함이 더한 것은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1691~1752) 등 당시 참가자 전원의 시詩 등 기록이 전할 뿐 아니라 이 아회의 기록을 조선시대 화성이라 일컬어지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5폭의 화면에 담았고 이와 더불어 당대 시성詩聖이라 불리우던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시가 합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0). 또한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아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어떻게 진행 되었으며 파했는지 그리고 이춘제의 집 후원과 그 모정에 관한 설명 등 그 자세한 기록이 전하기 때문에 18세기 당시 조선시대 양반들의 아회雅會 모습의 한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아회雅會란 문인들의 사적인 모임을 일컫는데 ‘아회雅會’라는 단어의 의미로 알 수 있듯 시문 풍류가 어우러진 고상하고 우아한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
‘글을 지으려고 모이는 모임, 아담한 모임11)’
이라 설명되어 있으나 앞서 언급했듯 ‘시문 풍류가 어우러진 문인들의 고상하고 우아한 사적인 모임’이 좀 더 적확한 설명이라 생각한다.
도 1. 김홍도, <서원아집西園雅集 6곡병>, 1778, 견본채색絹本彩色, 122.7 x 47.9cm, 국립중앙박물관
아회雅會 그 정확한 연원을 밝히기는 어려우나12) 문인들의 아회雅會 혹은 아집雅集의 전형은 북송대北宋代 이공린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13)’에서 찾을 수 있다. 서원아집도는 북송 원우 원년 (1086) 변경汴京 (開封)에 있던 왕선王詵 (1036~1104)의 저택 서편 정원에서 소식蘇軾 (1036~1101), 채조蔡肇, 이지의李之義, 소철蘇轍 (1039~1112), 황정견黃庭堅, 이공린李公麟, 조보지晁補之 (1053~1110), 유경劉逕 (1043~1100), 장래張來 (1046~1106), 진관秦觀 (1049~1101), 미불米芾 (1051~1107), 정정로鄭靖老), 왕공王鞏, 진경원陳景元, 왕흠신王欽臣, 원통대사圓通大師 등 16인 (진사도陳師道 (1052~1102)를 더하여 17인이라고도 한다)의 문인 묵객이 잔치를 벌이며 풍류를 즐기는 정경을 그린 그림으로 이공린이 그리고 미불이 기記 (서원아집도기西園雅集圖記)를 썼다고 전하나 그림은 전하지 않고 미불의 기記만 법첩法帖14)으로 전하는데 이후 이 미불의 기記 내용을 근거로 많은 서원아집도 (도 1)가 그려졌다15). 미불이 썼다는 〈서원아집도기西園雅集圖記〉를 살펴보면 아회雅會 혹은 아집雅集의 형식과 성격 등을 보다 상세히 알 수 있다.
西園雅集圖記
李伯時效唐小李將軍爲著色泉石雲物草木花竹,皆妙絶動人。而人物秀發,各肖其形,自有林下風味,無一點塵埃氣,不爲凡筆也。其烏帽黃道服捉筆而書者爲東坡先生。仙桃巾紫裘而坐觀者爲王晉卿。幅巾靑衣據方几而凝竚者爲丹陽蔡天啓。捉椅而視者爲李端叔。後有女奴,雲鬟翠飾,侍立自然,富貴風韻,乃晉卿之家姬也。孤松盤鬱,後有凌霄花纏絡,紅綠相間,下有大石案,陳設古器瑤琴,芭蕉圍繞,坐於石盤旁,道帽紫衣,右手倚石,左手執卷而觀書者爲蘇子由
團巾繭衣,手秉蕉箑而熟視者爲黃魯直。幅巾野褐,據橫卷畫淵明歸去來者爲李伯時。披巾靑服,撫肩而立者爲晁無咎。跪而捉石觀畫者爲張文潛。道巾素衣,按膝而俯視者爲鄭靖老,後有童子執靈壽杖而立。二人坐於蟠根古檜下,幅巾靑衣 袖手側聽者爲秦少游;琴尾冠紫道服撥阮者爲陳碧虛。唐巾深衣,昻首而題石者爲米元章。幅巾袖手而仰觀者爲王仲至。前有鬅頭頑童捧古硯而立。後有錦石橋,竹徑繚繞於清溪深處,翠陰茂密,中有袈裟坐蒲團而說無生論者爲圓通大師,傍有幅巾褐衣而諦聽者爲劉巨濟,二人並坐於怪石之上,下有激湍潀流於大溪之中,水石潺湲,風竹相呑,爐煙方裊,草木自馨。人間淸曠樂不過此。嗟乎!洶湧於名利之場而不知退者豈易得此耶? 自東坡而下,凡十有六人,以文章議論,博學辨識, 英辭妙墨, 好古多聞, 雄豪絶俗之姿, 高僧羽流之傑, 卓然高致。後之覽者,不獨圖畫之可觀,亦足仿佛其人耳16)。
“이백시 (이공린)가 당의 소이장군을 본받아 착색17)하였는데 샘과 바위, 운물18), 꽃과 대나무 모두 절묘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인물화에 뛰어나 각각 그 형상을 닮았으며, 스스로 탈속한 풍미가 있어 한 점 속세의 기운도 없으니, 범상한 필치가 아니다. 검은 모자 쓰고 누런 도의 입고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이는 동파선생 (소식)이다. 복숭아 빛 두건과 자주색 옷을 입고 앉아서 보는 이는 왕진경 (왕선)이다. 복건 쓰고 푸른 옷을 입고 방궤 (사각탁자)에 의지해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이는 단양 채천계 (채조)이다. 의자에 앉아 옆으로 기대어 보고 있는 이는 이단숙 (이지의)이다. 뒤에는 계집종이 쪽진 머리에 비취 장식을 하고, 부귀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왕진경을 모시면서 서있는 모양이다. 오래된 소나무 울창하고 뒤에는 능소화가 얽어져 붉은빛과 초록빛이 섞여 있고, 그 아래 큰 상석이 놓여 있어 고기古器와 금琴을 올려놓았으며 그 주위에는 파초가 드리워져 있다. 돌탁자 곁에 앉아 도인의 모자를 쓰고 자줏빛 옷을 입고 오른손은 의자에 기대고 왼손은 책을 집어든 채 그림을 보는 이는 소자유 (소철)이다. 둥근 두건 쓰고 비단옷 입고 한손에 파초 부채를 잡은 채 자세히 바라보는 이는 황노직 (황정견)이다. 복건 쓰고 거친 갈옷 입고 두루마리 (횡권)에 도연명의 귀거래를 그리는 이는 이백시 (이공린)이다. 피건 쓰고 푸른 옷 입고 어깨를 만지며 서 있는 이는 조무구 (조보지)이다. 무릎을 꿇어 앉아 돌탁자를 잡은 모습으로 그림을 보는 이는 장문잠 (장래)이다. 도건 쓰고 흰옷 입고 무릎을 누른 모습으로 기대어 그림을 보는 이는 정정로이며, 뒤에는 사내아이가 영수장 (영수목으로 만든 지팡이)을 잡고 서 있다. 굵은 가지가 휘감아 올라간 늙은 노송 아래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복건 쓰고 푸른 옷 입고 소매에 손을 넣은 모습으로 듣고 있는 이는 진소유 (진관)이고, 금미관 쓰고 자줏빛 도의 입은 모습으로 완(阮, 월금)을 연주하는 이는 진벽허 (진경원)이다. 당건 쓰고 심의深衣 입고 돌벽 위에 시를 적고 있는 이는 미원장 (미불)이다. 복건 쓰고 소매에 팔을 넣은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는 왕중지 (왕흠신)이다. 앞에는 흐트러진 머리를 시동이 오래된 벼루를 들고 서 있다. 뒤에는 금석교가 있고, 대숲 길은 깨끗한 시내 깊은 곳으로 감겨드니 푸른 그늘이 우거져 빽빽하다. 그 대숲그늘 가운데 가사 입고 부들방석에 앉아 무생론을 이야기하는 원통대사, 복건 쓰고 갈옷 입고 겸손하게 듣고 있는 유거제 (유경), 두 사람은 모두 너른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아래에는 빠르게 흐르는 여울이 있어 큰 시내 가운데로 모여 흐르는데, 물과 돌은 잔잔히 흐르고 바람과 대는 서로 어울리며, 향로의 연기는 가늘게 흔들리고, 초목은 절로 향기롭기만 하다. 세상 청광한 즐거움이 이보다 낫지 않으니 아! 명리에 들끓어 물러날 바를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이를 쉽게 얻겠는가? 소동파로부터 모두 열여섯 사람이 문장으로 의논하는데, 박학 변식하고, 훌륭한 말과 절묘한 글이요, 옛것을 좋아하고 들은 것이 많으며, 영웅호걸의 절속한 풍채와 고승ㆍ도사의 걸출함이 빼어나고 고상하다. 후에 보는 이는 다만 그림만이 아니라 그림을 보며 또한 그 사람을 방불19)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 북송 원우 원년 (1086) 변경汴京 (開封)에 있던 왕선王詵 (1036~1104)의 저택 서편 정원에서 이루어졌던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6~1101), 채조蔡肇, 이지의李之義 등 17인의 명사 문인들의 모임을 기미년己未年 (영조 15년, 1739) 여름 조선시대 명사 문인묵객文人墨客 8인 [이중희李仲熙 (이춘제李春躋), 조치회趙稚晦 (조현명趙顯命), 송원직宋元直 (송익보宋翼輔), 서국보徐國寶 (서종벽徐宗璧), 심시서沈時瑞 (심성진沈星鎭), 조군수趙君受 (?), 정선鄭敾, 이병연李秉淵]이 당시 인왕산 기슭에 위치해 있던 이춘제李春躋 (1692~1761)의 집 후원 서원西園과 그 정자인 서원소정西園小亭에서 재현하게 되었는데, 앞 서 간략하게 언급했듯, 이 모임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이 기록들을 모아 시화첩詩畵帖으로 꾸며놓은 것이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이다20).
이 《서원아회첩》은 첩이 온전한 형태로 전하지 않고 첩 내內의 글과 그림들이 각 개인들에게 나뉘어 전해지고 있어 전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인 연구만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논고 역시 《서원아회첩》의 전면全面을 다루지 못한 불완전한 논고가 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과 사천李秉淵 이병연李秉淵의 시서詩書 등 새로운 자료의 발견으로 불완전하게나마 첩의 전체모습을 추정해 보려한다. 먼저 아회첩의 구성과 첩에 담긴 기記, 시서詩書들의 내용을 살펴 이 첩의 연원淵源을 밝히고, 이춘제 자신이 기록한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와 귀록이 손수 적은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의 내용확인을 통하여 18세기 조선에서 성행했던 양반문인들의 아회雅會 (아집雅集)와 풍류의 한 모습을 알아보려 한다. 또한, 이 첩에 담긴 겸재의 다섯 폭 산수화와 남아있는 제시들을 살피고, 각각의 작품에 담겨있는 의미와 겸재의 산수와의 관계를 밝혀, 이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의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알아보려 한다.
1) 조현명趙顯命, 1691 (숙종 17)∼1752 (영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이다.
1713년 (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 (경종 1) 연잉군 (延礽君: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하여 있던 왕세제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 (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하였던 정치가이면서, 한편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환수, 결포제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는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조현명의 탄생년은 대부분의 조현명 관련 자료에서 보이는 1690년 (숙종 16)이 아니라 1691년 (숙종 17) 이 옳다. 조현명은 자신이 생전에 손수 편집한《귀록집》중 권후卷後에 자저기년自著紀年을 붙였는데 그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歸鹿集卷之二十
余以肅宗卽位之十七年辛未十月庚子二十二日癸卯癸丑時。生于乾洞大第。先君夢以小兒。具新恩幞袍。謁始林君廟。始林君。祖妣洪夫人外祖。覺則已生。喜曰。兒必早貴也。邀卜者金秋星推命。秋星賀曰。此大人之命也。
壬申。二歲。是年春。闔家遘癘。三月二十一日。先君下世。余亦幾死而蘓。冬。與叔氏文忠公。經痘。
이 기록 첫 부분을 살피면 귀록 조현명 자신의 생시를 밝힌 ‘余以肅宗卽位之十七年辛未’ 문구를 볼 수 있다. 현재 전하는 《귀록집》이 타인에 의하여 필사된 ‘필사본’인 점을 감안하면 오기의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이본 필사본 자저기년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오기의 가능성이 낮다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귀록집 참조]
2) 송익보宋翼輔, 1689 (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원직元直. 정명正明의 아들이다. 경기도 용인출신.
1714년 (숙종 40)진사과에 합격한 뒤 교관 (敎官)을 거쳐, 1731년 (영조 7) 강서현령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를 지내고, 다음해 충청도관찰사로 재직중 인척 송익휘宋翼輝 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1742년 대사간을 거쳐 그 다음해 평안도를 순찰하고 서울로 돌아와 그 지방의 군비실태와 군민軍民의 어려움을 사실대로 보고하여 정책에 반영하였다.
1744년 황해도관찰사, 다음해에 대사간·승지, 1747년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참조]
3) 서종벽徐宗璧, 1696 (숙종 22)~1751 (영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 (達城). 자는 국보國寶.
성渻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판서 문유文裕이다.
25세에 진사에 올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보임된 뒤, 삼척부사·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을 역임하였다. 어가御를
따라 온양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가 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며, 뒤에 목사까지 지냈다.
56세 되던 해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771년 (영조 47) ‘강감綱鑑의 사건’에 연루되어 사후, 생전의 관작을 삭탈당한 바 있다.
* 강감綱鑑의 사건
강감이란 청나라 주린朱璘이 지은 사서 《강감회찬綱鑑會纂》을 이름인데 이 사서 중 명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명기집략明紀輯略> 부분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잘못된 내용과 선조가 술에 빠져
국방을 소홀히 했고, 인조가 임금 자리를 찬탈했다고 주장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어 이에 격분한 영조는 청에
우의정 김상철을 파견해 주린朱璘을 처벌할 것과《강감회찬綱鑑會纂》의 소각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책을 가진
사람은 자수하기를 명하는 동시에 책 중개상인인 책주름들을 체포해 책을 판 곳을 실토케 했다. 이 과정에서 이
희천 등이 잡혀 왔고 이희천李羲天은 죽임을 당하였고 타 연루자들도 처형당하거나 유배되어졌다. 그리고 《강감
회찬綱鑑會纂》중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찍힌 도인이 서종벽의 인장으로 밝혀짐에 따라 지평
홍빈洪彬이 전계로 서종벽의 관직추탁을 청하였는데 영조가 이를 윤허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
目》, 《사마방목司馬榜目》, 노대환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 (역사의 아침, 2007) 참조]
4) 심성진沈星鎭, 1695 (숙종 21)~1778 (정조 2년), 시서時瑞는 자. 본관은 청송靑松. 숙종肅宗 45년 (1719) 기해己亥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二等 17위를 하였고, 영조英祖 3년 (1727) 정미丁未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7위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행연원도찰방行連原道察訪 [조선시대 역驛을 관리하던 관리를 찰방이라 하며, 하나의 읍(현) 내 혹은 여러 도시에 있는 역을 총괄하는 관리를 도찰방都察訪이라 함. 종 6품이다]을 지낸 통훈대부通訓大夫 심준沈埈이다. 심성진은 정언正言 (영조 5년, 1729), 서장관書狀官 (영조 5년, 1729), 헌납獻納 (영조 10년, 1734), 집의執義 (영조 12년, 1736), 승지承旨 (영조 15년, 1739), 대사간大司諫 (영조 17년, 1741), 이조참의吏曹參議 (영조 24년, 1748), 대사헌大司憲 (영조 30년, 1754)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 등 두루 요직을 겸하였다.
심성진의 인적사항이 기재된 사마방목과 국조문과방목에 생년이 을해乙亥 (1695)년으로 전하나 몰년은 전하지 않는데, 조선시대 후기 학자이자 관료인 신대우 (1735~1809)의 개인문집인 《완구유집宛丘遺集》에 심성진의 묘문墓文이 전하고 있어 심성진의 생몰년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을 살펴보자.
宛丘遺集卷之五
墓文[一]
禮曹判書貞惠沈公神道表
原任禮曹判書貞惠沈公旣卒之十有九年。嗣子興永將樹神道之表。平州申大羽爲之序以揭曰。公當朋黨頃敓之際。平和以衷其操。保合以措諸事。蚤已審取捨之幾。雖世故之嬗遷靡常。而公則不激不渝。立朝五十年如一日。爲時名公卿。不旣韙與。逆臣厚謙自以故人稺孫。時節納床下之拜。而公之待之也。常於落穆。於其退輒曰凶國害家人也。其言頗聞於外。而厚謙亦遂謝迹於公之門矣。烏呼。大防隤而廉恥喪。跳徼濡需。用自敗其身者不可一二數。公獨皎然而處。介然自持。愼其終。益厲于始。於是公又賢遠於人矣。英廟嘗下手書于公曰。若問恬澹。捨卿誰先。公感涕曰上之知臣及此乎。仍以澹名其窩。自號焉。公嶺南靑松府人。諱星鎭字時瑞。著自靑城伯德符。世以名德顯。有諱之澤當灮海時。潛德不仕。於公高祖。曾祖諱櫟。昌平縣令。祖諱廷煕。用經行 句 薦授齊陵參奉。考諱埈。大司諫。母坡平尹氏副提學搢之女。肅宗二十年公生。年二十五中司馬進士試。擢英宗三年增廣文科。旋授侍講院說書司諫院正言。以書狀官赴燕。選玉堂。繇吏曹郞至東壁。兼春坊學敎授校書校理知製敎。進拜承宣。轉司諫院大司諫成均館大司成。吏戶禮兵刑五曹參議。在吏曹多且久。進拜司憲府大司憲。參判吏禮工三曹。同知經筵春秋館事。提擧槐院籌司。進判漢城府。拜禮刑工三曹判書。政府參贊。知經筵春秋成均二館事。爲遠接使。入耆老社。進判義禁敦寍二府事。間嘗出守關西之永柔定州成川。嶺南之安東。又嘗觀察關東京畿二道。留守沁州。階至輔國崇祿大夫。今上二年公年八十有四。九月一日考終于第。用其年十一月辛卯。葬京畿廣州雙嶺之原開趙夫人墓左合封焉。夫人楊州之族。翊衛司侍直泰萬女。吏曹參議嘉錫孫。刑曹判書啓遠曾孫。貞純端哲。公甚敬重焉。生後公二年。先公十一年卒。擧男不育。以從子得雲爲後。夭無嗣。乃立族弟子子之。興永是也。官今弘文校理。旣克趾先美。又能載煭金石。式闡幽徽。可謂孝矣。凡詳於碑者。悉略之。所以昭公德於大致。爲示無止也。是爲表。
위 내용을 보면 심성진의 생년은 숙종 20년 (1694)으로 되어있고 몰년은 정조 2년 (1778) 그의 나이 84세 (만 83세)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생년의 기록이 사마방목과 국조문과방목의 기록과 1년의 시차가 나 좀 당황스럽다. 신대우나 묘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국가시험 기록의 내용을 더욱 신뢰하여 생년을 1695년으로 한다. (심성진 생년에 관한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참조]
* 신대우申大羽
신대우申大羽 (1735년~1809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양명학자이다.
1784년 (정조 8) 50세에 음보음서제도로 관직에 나가 선공감의 가감역, 경희궁 수리관, 동부도사, 경릉령 등을 거친 후 9년 동안 각지의 수령을 지냈다. 1798년 청도군수 재직 중 자신의 봉급 30만 전을 기부하여 성을 개축하고 남문의 홍례문을 개축하였다. 이듬해 학문의 훌륭함과 덕행을 인정받아 동궁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동궁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익위사 익위에 올랐다. 1801년 순조 즉위 후 승정원 우부승지 등 10회의 승지를 역임하고 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동지돈녕부사·경연 특진관·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시문과 서예를 잘 지었고 저서로는 《완구유집宛丘遺集》 10권을 남겼다. 아들은 신현·신작申綽이다. 신현은 신익희의 증조부가 된다. 신대우는 정제두에 의해 발전한 양명학을 계승한 배운 인물이다. 그는 조선 후기에 인간주체성과 민족주체성의 자각 위에서 실천을 추구하며 새롭게 대두한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갔다. 정제두의 사상을 계승한 제자이자 그의 아들 정후일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의 손녀사위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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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군수趙君受가 누구인지 시화첩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내 참가자 전원의 시를 확인할 수 없어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정황상 조원명趙遠命 (1675~1749)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서원주인 이춘제李春躋 (1691~1761)가 조원명의 큰사위였으며,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과 조원명은 재종 (육촌)지간 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하기로 한다.
* 조원명趙遠命
1675 숙종 1)~749 영조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경致卿. 아버지는 직장 기수祺壽
이며, 어머니는 종실宗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딸이다.
1702년 (숙종 28) 사마시를 거쳐 17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용강현령龍岡縣令을 거쳐 정언에 올라
그해에 일어난 과옥科獄의 재심(再審)을 강력하게 청하다 삭탈관직 되었다.
그러나 곧 간관에 복직되었으며, 이어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으나 격식에 어긋났다 하여 삭제되었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지평·부수찬·헌납·교리·사인·부응교·집의·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나아가지 않았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부응교를 지내고 다음해 동부승지·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노론의 집권으로 파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이조참의·부제학·승지·대사성을 역임하고, 1728년 개성유수 때 왕씨
능침陵寢의 수호를 명받았고, 대흥산성大興山城 수비의 소를 올려 시행하게 하였으며, 기근이 들자 녹봉을 기
민 진구賑救에 내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어 공조참의가 되어서는 양역법良役法의 개정과 균역법均役法의 실시에 힘썼다.
그 뒤 대사헌·부제학 등을 두루 지낸 뒤 1733년 함경도관찰사로 전임되자 전삼田蔘의 폐해를 고치는 등 선정을
베풀었고, 이어 승지·이조참판·예조참판을 지내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이도확립吏道確立과 재정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함흥의 10리나 되는 만세교萬歲橋의 보수를 위하여 기본자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740년 이후 공조참판·부총관·동지경연사의 벼슬을 거쳐 병으로 사임하였다.
1744년 나이 70에 자헌대부에 가자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한성부판윤·동지성균관사·지중추부사·공조
판서를 역임하고, 1749년 정헌대부로 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평생 50년을 조정에 봉직하였으나 사사로움이 없었으며, 평양감사를 지냈으면서도 돌아오는 행장은 타고 나선 말
한필뿐이었다고 한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
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참조]
6) 정선鄭歚, 1676 (숙종 2)∼1759 (영조 35).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1. 가계
아버지는 시익時翊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2. 관직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그 뒤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위수 (衛率:王世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 청하현감을 지냈으며, 또 자연·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랑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3. 화업수련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30세 전후의 금강산그림 등을 통하여 젊을 때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확실하지만, 40세 이전의 확실한 경력을 입증할만한 작품이나 생활기록자료는 없다.
그가 중인中人들이 일하고 있었던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원래 사대부출신으로 신분상의 중인은 아니며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한 양반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그림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막연한 중국의 자연을 소재로 하던 시나 문학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산수화의 화제畵題는 빛을 잃고, 대신 우리 자연으로 대치하게 되는 시기에 태어난 그는 마침 중국에서 밀려들어오는 남종화법南宗畵法이나 오파吳派와 같은 새로운 산수화기법에 접하게 되고, 또 당시 다시 유행하게 된 시서화 일체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 사이에 참여하여 자신의 교양을 높이거나 창작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이병연李秉淵같은 시인과의 교우를 통하여 자기 회화세계에 대한 창의력을 넓히고 일상적 생활의 주제를 회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연을 다룬 그의 화제들은 당시 기행문의 소재였던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한 것들이다.
그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웠던 서울장안의 사철의 경치들, 특히 인왕산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가 되었으며, 문인지우文人知友들과 관련되는 여러 곳의 명소나 특수한 고장들의 자연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사도故事圖같은 중국적 소재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성리학자들의 고사도 제작에서 그의 관심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4. 회화기법
회화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畵法이나 채색화彩色畵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는데,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 소장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는 인왕산의 둥근 바위봉우리 형태를 전연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는데, 바위의 중량감을 널찍한 쉬운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하여 표현하며積墨法, 또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의 〈통천문암도通川門巖圖〉에서는 동해안 바위 구조를 굵직한 수직선으로 처리하여 세밀한 붓놀림이나 채색·명암 등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진 붓쓰임의 예는 서울근교나 해금강은 물론 우리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묘사법인데,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 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면서도 들어맞게 그린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1734년 작 〈금강전도金剛全圖〉(130.7×95㎝)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을 하나의 큰 원형구도로 묶어서 그리는데, 이는 기법상 천하도天下圖라는 전통적인 지도제작기법에 근거하며, 금강내산을 한 떨기 연꽃 또는 한 묶음의 보석다발로 보는 종래의 자연묘사시에서 조형적 원리造形的原理를 따오는 기발한 착상이다. 우선, 원형을 대강 오른쪽의 골산 (骨山:금강내산의 화강암바위로 된 삐쭉삐쭉한 모습)과 왼쪽의 토산 (土山:금강내산의 수림이 자라는 둥근 묏부리)으로 구분하되, 골산은 예리한 윤곽선으로, 토산은 그의 독특한 침엽수법針葉樹法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다. 그다음 이 원형외곽을 엷은 청색으로 둘러 여타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산 자체만을 돋보이게 한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원의 중심이 되는 만폭동萬瀑洞에 일단 모이게 하여 구도상의 중심을 이룬 다음, 화면의 앞쪽으로 흘러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를 지난다. 이 그림은 실제의 자연을 새로 해석하여 조형화한 좋은 예이며, 오른편 위쪽에 쓴 제시題詩의 내용과 형태가 일치한다. 그의 회화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寫意畵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주는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5. 평가와 업적
이러한 그의 창의력은 그가 즐겨하였다는 역易의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의 소재·기법 어느 것에나 구애됨이 없이 소화하였으며, 심지어 지두화指頭畵까지도 실험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가까운 교류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 등 중국 고전문학과 사상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을 조형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미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시화첩詩畵帖같은 것은 선비들 간에 시짓고 그림그리기와 글씨쓰기놀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실경산수화를 다루는 경우에는 시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그는 이미 말한 노론의 명문인 안동 김 씨네와의 관계에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과 우수한 수장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며, 그 중에서도 김창흡金昌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파벌에만 치우치지 않은 매우 폭넓은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의 계속적인 승진은 영조가 세제로 있을 때 위솔이라는 직책으로 있었기 때문에 입은 배려로 생각되며, 이것이 노년에도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하겠다. 그는 조선시대의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선비나 직업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화법謙齋派畵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실경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최북崔北·김응환金應煥·김홍도金弘道·정수영鄭遂榮·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은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畵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또, 초년기의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화가로서의 생애를 전부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참조]
7) 이병연李秉淵, 1671 (현종 12)∼1751 (영조 27).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일원一源. 호는
사천槎川 또는 백악하白嶽下. 산보山甫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속涑이다. 병성秉成의 형이다.
백산白山이라는 곳에 살았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며, 벼슬은 음보蔭補로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시에 뛰어나 영조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문인 김익겸金益謙이 그의 시초詩抄 한 권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강남江南의 문사들이 “명나라 이후의 시는 이 시에 비교가 안 된다.”라고 그의 시를 극찬하였다고 한다.
일생 동안 무려 1만300여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현재 시집에 전하는 것은 500여 수 뿐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산수·영물시로, 대개 서정이 두드러지고 깊은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매화를 소재로 55수나 되는 시를 지었는데, 이는 대개 은일적인 기분을 표현한 것으로 생生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은연중 표현하고 있다.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의경을 흠모하였던 것 같다.
80세가 넘도록 시작 생활을 계속하였다. 저서로는 《사천시초》 2책이 전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사마방목司馬榜目》참조]
8) 지금까지 7인의 모임으로 알려져 왔으나 8인이라야 첩 내의 기록과 일치한다. 자세한 설명은 후술할 ‘서원아회(기)’편을 참조하기 바란다.
9) 기쁘고 즐거운 모임.
10) 엄밀히 말하면, 서원아회西園雅會때 직접 그려졌던 그림은 ‘서원아회’, ‘옥동척강’, ‘풍계임류’ 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2) ‘아회雅會 혹은 아집雅集’은 주로 친목도모를 위한 개인적인 모임으로 그 용어는 같지 않았겠지만 지인들과의 모임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고, 그 모습과 형식에 있어서도 ‘전형, 전범’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기록들이 존재했을 거라 사료되는바 현재 전하는 기록들만을 근거로 연원을 밝히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13) 〈서원아집도기西園雅集圖〉의 허구성에 관한 여러 지적들이 있으나 이 논고에서 다루지 않는다.
Laing, Ellen Johnston. "Real or Ideal: The Problem of the 'Elegant Gathering in the Western Garden' in Chinese Historical and Art Historical Records,"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88, 3. (July-September 1968), pp. 419-435
14) 옛 사람들의 유명한 필적을 돌 또는 나무 (판목)에 새기고 탑본하여 글씨를 익히거나 감상할 목적으로 만든 책.
15) 월간미술, 《세계미술 용어사전》(서울: 월간미술, 1999), p. 236.
16) 〈北宋李公麟西園雅集圖〉, 《式古堂書畵彙考》33, 《四庫》828, pp. 433~434.
송희경, 《조선후기 아회도》, (서울: 다할미디어, 2008), p. 280.
17) 그림이나 물건에 물을 들이거나 색을 칠하여 빛깔이 나게 함.
18) 구름의 기운과 색.
19) 거의 비슷하다, 흐릿하거나 어렴풋하다, 무엇과 같다고 느끼게 하다.
20) 최완수, 『겸재 정선 2』(현암사, 2009), p. 24.
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범우사, 1993), p. 190.
이강호, 『고서화』(삼화인쇄주식회사, 1978),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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