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아회첩

II. 《서원아회첩 西園雅會帖》

Moam Collection 2010. 9. 13. 11:17

 * 본 논고는 출판예정된 것으로 무단이용시 법적제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II. 《서원아회첩 西園雅會帖》


1. 아회첩雅會帖의 구성

 

 


도 2.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 개인소장

 (사진촬영 1975년 이영재)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도 2)은 약 40면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표지에 ‘서원아회西園雅會’라는 집 후원인 서원과 그곳에 있던 정자 서원소정西園小亭의 주인인 이춘제李春躋 (1692~1761)의 표제表題가 있었다. 표지를 열면 좌측 한 면에 조선시대 묵객 8인이 가졌던 아회의 모임을 겸재가 그린 ‘서원아회西園雅會’도1)가 위치해 있고, 뒷면 우측면에는 아회 참가자 중 7인이 옥류동玉流洞 산등성이를 오르는 모습을 겸재가 화폭에 담은 ‘옥동척강玉洞陟崗’도, 그 다음 면에는 이춘제의 집 후원인 서원에서 시작하여 옥류동 산등성이를 넘어 세심대洗心臺를 지나 청풍계淸風溪에 이르는 산행을 마친 후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위 사이를 졸졸 흐르는 시내에서 흐른 땀을 씻는 모습을 역시 겸재가 화폭에 담은 ‘풍계임류楓溪臨流’도가 위치해 있었다. 다음 두면에 걸쳐 이 아회의 시작부터 파할 때까지의 정경을 이춘제가 글로 세세히 기록한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가 있었고, 이 후 수면에 걸쳐 참가자 전원의 시서들이 첩의 장장을 채우고 있었으며, 이 화첩의 중간 부분 두면에 고쳐지은 모정과 가꾸고 다듬어진 정원이 있는 이춘제 집 후원과 그 정자의 모습을 겸재가 그린 ‘서원소정西園小亭’도와 그 다음 역시 두면에 걸쳐 이춘제가 자신의 후원 정자 ‘서원소정’에 앉아 경복궁景福宮, 사직단社稷壇, 인경궁仁慶宮 을 비롯하여 남산南山, 관악산冠岳山, 남한산성南漢山城에까지 이르는 한양전경漢陽全景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겸재가 담은 ‘한양전경漢陽全景’도가 위치해 있었다. 이 뒤 다시 두면에 걸쳐 이춘제 자신이 귀록 조현명에게 자신이 지은 집 후원에 위치한 소정의 이름들 중 택하여 달라고 부탁한 편지에 대한 답으로 귀록이 지어 보낸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가 담겨있었고, 이 뒤 다시 수면에 걸쳐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시서 및 아회 참가자들의 시가 장장이 전하고 있었다.


첩의 겉표지는 노란색 비단으로 입혀져 있었으며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다섯 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견본담채絹本淡彩 형태로 첩 온면에 덧붙여졌고 이춘제李春躋와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두 편의 기記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시서 및 아회 참가자 중 그림을 그렸던 겸재를 제외한 7인의 시서詩書들은 지본수묵紙本水墨으로 가장자리 부분이 덧대어져 담겨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시화첩의 양식을 지니고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도 2 참조)



2. 아회첩雅會帖의 내력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의 연원과 그 내력에 관하여 첩帖 내內에 특별히 기록된 내용은 없다. 다만 이춘제 자신이 지어 기록한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도 3)의 내용 중 이 시화첩을 만들게 된 동기를 보여주는 부분이 있어 다행히 미흡하나마 첩이 전하여 지는 과정을 추정하여 볼 수 있다. 먼저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의 내용을 알아보자.

 

 

 

도 3.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개인소장

(사진촬영 1975년 이영재)



西園雅會


休官以來, 病懶相成, 未窺家後小圓者, 久矣,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2), 以謀小會, 歸鹿趙台, 聞風而至。于時驟雨飜盆, 後晴, 登臨西園, 仍又聯袂, 雨出柴扉, 徘徊於玉流泉石, 歸鹿忽飛筇着芒, 攀崖陟嶺, 步履之捷, 不減小壯, 諸公躋後, 無不膚汙氣喘, 以俄頃之間, 乃能越巒, 而度壑, 楓溪之心庵 古亭, 倏在目下。此殆詩所謂, 終踰絶險, 曾是不意者也。

及其穿林而下, 臨溪而坐, 卽一條懸瀑, 潺溪石間。濯纓濯足, 出滌煩襟, 去之膚汙而氣喘, 咸曰 微豊原, 安得務此, 今谷之游, 實冠平生。於亭逍遙, 竟夕忘歸, 臨罷, 歸鹿, 口呼一律, 屬諸公聯和, 請謙齋筆, 摹寫境會, 仍作帖, 以爲子孫藏, 甚奇事也, 豈可無識。  

顧余 自小不好詩學, 老又有眼高手卑之症, 凡於音韻淸濁高低者不經, 與親舊挹別逢歸, 酬唱, 一切未嘗開路。故輒以此謝之, 則歸鹿, 又責之以湋詩令, 不得已 破戒塞責, 眞是肉談詩云乎哉。


己未季夏 西園主人     


“휴관이래 병과 게으름이 상성하여 집 뒤 소원(서원소정)을 들여다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는데,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 작은 모임(소회)을 도모했는데, 귀록 조대감이 소식을 듣고 이르렀다. 그때 소나기가 내려 물이 넘쳐흘러, 개인 후에 올라 서원(소정)에 임하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좆으며 또 연몌連袂3)하며 시선4)을 나와 옥류천석에서 배회하는데 귀록이 홀연히 지팡이를 날리며 짚신을 신고 비탈을 타며 산마루를 오른다. 걸음이 빠른 것이 소장小壯에 덜하지 않아 제공이 뒤따라 오르는데 땀이 나고 숨차지 않음이 없었는데 잠깐 사이에 산등성이를 넘고 골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청)풍계의 (원)심암과 (태)고정이 홀연 눈 아래 있다. 이것은 당초 시경에 이르기를 "마침내 절험을 넘었으니 이것은 일찍이 뜻한 바가 아니다."라 한 것과 같다. 마침내(급기) 숲을 뚫고 내려가 시내에 임하여 앉으니 곧 한 줄기 걸린 폭포가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른다. 갓끈을 빨고 갓을 씻고 답답한 가슴을 내어 씻어 땀나고 숨찬 것을 다 털어내고 나서 모두 이르기를, "풍원(조현명)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렇게 힘쓸 수 있었겠는가? 오늘 계곡놀이는 실로 평생 으뜸일 것이다."라 하였다.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고,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니 그대로 시화첩(서원아회첩)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기이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를 돌아보건대, 어려서부터 '시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이 들어서는 또 눈이 높고 손이 낮은 증세(병)가 있어 무릇 시를 짓는데 마음을 두지 않아 친구와 만나고 헤어질 때 시를 주고받는 일에 일절 길을 연 적이 없다. 그런고로 문득 이것으로써 사양하였더니 귀록이 또 '시령'을 어긴 것을 책망한다. 부득이 파계하여 책망을 막기는 하나 참으로 이는 '육담(육두문자)시'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기미(1739)년 여름 서원주인5)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의 후반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於亭逍遙, 竟夕忘歸, 臨罷, 歸鹿, 口呼一律, 屬諸公聯和, 請謙齋筆, 摹寫境會, 仍作帖, 以爲子孫藏, 甚奇事也, 豈可無識。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고,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니 그대로 시화첩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기이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춘제李春躋의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이 문장에 의하면, 이러한 아회雅會가 이루진 일이 매우 신기한 일이기 때문에 아회에 관한 기록을 남김에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대감이 먼저 시 한수를 지어 읊고 이춘제를 비롯한 참가자 전원에게 시 짓기를 권했던 모양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우리 조선시대朝鮮時代 사대부들의 멋들어진 풍류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에 참가자 전원이 시를 여러 편 지어 남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이춘제는 동석했던 겸재謙齋 정선鄭敾에게 정중히 청하여 또한 이 아회의 모습과 정취를 빼어난 다섯 폭의 화폭6)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이어 이춘제는 아회를 통한 이 시들과 그림들을 그대로 시화첩詩畵帖으로 꾸며 가보家寶로 자손들(후손들)에게 물려주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위 이춘제李春躋의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내용대로, 이 시화첩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은 1970년 대 까지 이춘제의 후손後孫 가家에 전해진다. 후손 가에 전해지던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은 이 후 1975년 모운茅雲 이강호李康灝 (1899~1980)7)의 집안으로 전하여 지게 되는데, 얼마 후 다시 이춘제 후손인 이모 씨氏8)의 요청으로 첩의 제일 첫 그림이었던 《서원아회도西園雅會圖》를 제외한 겸재 정선의 그림 4폭 (옥동척강玉洞陟崗, 풍계임류楓溪臨流, 서원소정西園小亭, 한양전경漢陽全景)과 귀록 조현명과 사천 이병연의 시서詩書 각 1점을 뺀 모든 시詩와 기記들은 다시 이춘제 후손가로 돌아가게 된다.9)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내內의 그림들과 두 편의 시가 뜯어지게 되었는데 이에 모운茅雲 장丈10)께서 애석해 하셨다 한다. 이 뜯어진 그림들과 시서 두 편은 모암문고茅岩文庫 (The Moam Collection, Korea)를 포함한 각 개인에 전하고 있다.  

            


1) 〈서원아회도〉와 〈풍계임류도〉는 현재 작품을 확인할 수 없어 단언할 수 없지만 〈옥동척강〉에서와 같이 아회 참가자 7인이 화면에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이는 그림을 그린 당사자인 진경화가 겸재 정선이 화면에서 빠져 7인만이 표현되었다 생각할 수 있으나 다른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2) 이 부분의 해석이 조금 애매하다. 원문의 문맥상 ‘조군수趙君受’를 인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조군수趙君受’를 인명으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에 따라 그 해석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자세한 설명은 ‘서원아회(기)’편을 참조하기 바란다.  


3) 가지런히 서서 함께 가거나 옴.


4) 울짱, 목책 사립문.


5) 최완수, 상동서 (현암사, 2009), p. 24.

    최완수, 상동서 (범우사, 1993), p. 190.

    이강호, 상동서 (삼화인쇄주식회사, 1978), p. 15.


6) 이 아회에서는 세 폭. (각주 9 참조)


7) 본관 전주. 효령대군 18대손. 학자이자 서화감식가 이다. 전 충남대학교 총장 동교東喬 민태식閔泰植          (1903~1981), 학자이자 정치가인 윤석오尹錫五(1912~1980), 한학자 조국원趙國元, 전 성균관장 취암醉巖

     이재서 李載瑞, 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전 여의도 성모병원장 간산干山 정환국鄭煥國               (1922~1999) 등과 평생 교유하였다. 고서화 감식에 명망이 높아 1943년 위당爲堂(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그 정취를 극히 찬양하여 1943년 ‘모운茅雲’이라는 호와 10폭 대작 병장을 서봉하였다. 이

     병장이 지금까지 모암문고茅岩文庫에 전한다.

     이강호,《고서화古書畵》(삼화인쇄주식회사, 1978) 

     Yong-Su Lee, Art Museums - Their History, Present Situation and Vision: The Case of the

     Republic of Korea(Chicago: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2007), p. 60.   


8) 이미 고인이 되셨겠지만 결례가 될 수 있어 이춘제 후손인 이모李某 씨氏의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9) 비록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던 가보家寶인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을 내놓았지만 최   대한 이 집안의 가보家寶를 지키려 한 후손의 정성은 필히 알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 모운茅雲 이강호李康灝 (1899~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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