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서원아회첩 西園雅會帖》을 통해 본 조선시대 사대부의 풍류
1. <서원아회(기) 西園雅會(記)>
도 3.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기미년 여름, 1739), 개인소장, (사진촬영 1975년 이영재)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는 아름다운 모임 (가회)이 우연히 이루어졌던 정원인 서원西園과 그 정자인 서원소정西園小亭의 주인 이춘제李春躋가 이 아회 (서원아회西園雅會)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담은 글로서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내內에 전한다.
이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를 통하여 우리는 이 아회雅會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아회의 구성원은 누구였으며,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진행이 되었으며 파罷했는지 그 전모全貌를 파악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이춘제의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와 그 뒤에 이어지는 시詩를 상세히 살펴보자.
西園雅會
休官以來, 病懶相成, 未窺家後小圓者, 久矣,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 以謀小會, 歸鹿趙台, 聞風而至。于時驟雨飜盆, 後晴, 登臨西園, 仍又聯袂, 雨出柴扉, 徘徊於玉流泉石, 歸鹿忽飛筇着芒, 攀崖陟嶺, 步履之捷, 不減小壯, 諸公躋後, 無不膚汙氣喘, 以俄頃之間, 乃能越巒, 而度壑, 楓溪之心庵 古亭, 倏在目下。此殆詩所謂, 終踰絶險, 曾是不意者也。
及其穿林而下, 臨溪而坐, 卽一條懸瀑, 潺溪石間。濯纓濯足, 出滌煩襟, 去之膚汙而氣喘, 咸曰 微豊原, 安得務此, 今谷之游, 實冠平生。於亭逍遙, 竟夕忘歸, 臨罷, 歸鹿, 口呼一律, 屬諸公聯和, 請謙齋筆, 摹寫境會, 仍作帖, 以爲子孫藏, 甚奇事也, 豈可無識。
顧余 自小不好詩學, 老又有眼高手卑之症, 凡於音韻淸濁高低者不經, 與親舊挹別逢歸, 酬唱, 一切未嘗開路。故輒以此謝之, 則歸鹿, 又責之以湋詩令, 不得已 破戒塞責, 眞是肉談詩云乎哉。
己未季夏 西園主人
“휴관이래 병과 게으름이 상성하여 집 뒤 소원(서원소정)을 들여다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는데,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 작은 모임(소회)을 도모했는데, 귀록 조대감이 소식을 듣고 이르렀다. 그때 소나기가 내려 물이 넘쳐흘러, 개인 후에 올라 서원(소정)에 임하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좆으며 또 연몌連袂하며 시선을 나와 옥류천석에서 배회하는데 귀록이 홀연히 지팡이를 날리며 짚신을 신고 비탈을 타며 산마루를 오른다. 걸음이 빠른 것이 소장小壯에 덜하지 않아 제공이 뒤따라 오르는데 땀이 나고 숨차지 않음이 없었는데 잠깐 사이에 산등성이를 넘고 골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청)풍계의 (원)심암과 (태)고정이 홀연 눈 아래 있다. 이것은 당초 시경에 이르기를 "마침내 절험을 넘었으니 이것은 일찍이 뜻한 바가 아니다."라 한 것과 같다. 마침내(급기) 숲을 뚫고 내려가 시내에 임하여 앉으니 곧 한 줄기 걸린 폭포가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른다. 갓끈을 빨고 갓을 씻고 답답한 가슴을 내어 씻어 땀나고 숨찬 것을 다 털어내고 나서 모두 이르기를, "풍원(조현명)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렇게 힘쓸 수 있었겠는가? 오늘 계곡놀이는 실로 평생 으뜸일 것이다."라 하였다.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고,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니 그대로 시화첩 (서원아회첩)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기이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를 돌아보건대, 어려서부터 '시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이 들어서는 또 눈이 높고 손이 낮은 증세(병)가 있어 무릇 시를 짓는데 마음을 두지 않아 친구와 만나고 헤어질 때 시를 주고받는 일에 일절 길을 연 적이 없다. 그런고로 문득 이것으로써 사양하였더니 귀록이 또 '시령'을 어긴 것을 책망한다. 부득이 파계하여 책망을 막기는 하나 참으로 이는 '육담(육두문자)시'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기미(1739)년 여름 서원주인1)”
이어 시가 이어진다.
小園佳會偶然成,
杖屢逍遙趁晩晴,
仙閣謝煩心己靜,
雲巒耽勝脚益經,
休言溒陟勞令夕,
誇託來游冠此生,
臨罷丁寧留後約,
將軍風致老槎淸。
소원의 가회 (기쁘고 즐거운 모임) 우연히 이루어지니
지팡이 들고 짚신 신고 비 걷힌 저녁 산을 소요하네.
선객 (신선)이 번거로움 사양하니 마음 이미 고요하고
구름 산 승경 찾으니 다리 가볍네.
멀리 올라 오늘 저녁 피곤하다 말하지 말게
자랑하며 와서 논 것 (유람한 것) 이 생애 제일 (으뜸).
파함에 임해 정녕 지체하며 뒷기약 두니
장군의 풍치와 사천 노장의 맑은 뜻일세.
(歸鹿方帶將符, 且每自稱將軍故云.)
(귀록이 바야흐로 장수의 증표를 띠고, 또 매양 장군이라 자칭하기에 이렇게 읊는다.)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의 첫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회가 이루어진 이유를 비롯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休官以來, 病懶相成, 未窺家後小圓者, 久矣,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 以謀小會, 歸鹿趙台, 聞風而至。
“휴관이래 병과 게으름이 상성하여 집 뒤 소원(서원소정)을 들여다 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는데,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 작은 모임(소회)을 도모했는데, 귀록 조대감이 소식을 듣고 이르렀다.”
도 4. 겸재謙齋 정선鄭敾,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옥동척강玉洞陟崗〉(기미년 여름, 1739), 견본담채絹本淡彩, 34.5 x 34.0cm, 개인소장
도 4-1. 겸재謙齋 정선鄭敾,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옥동척강玉洞陟崗〉부분 (기미년 여름, 1739), 견본담채絹本淡彩, 33.5 x 33.8cm, 개인소장
먼저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의 해석이 중요하다. 이 부분의 해석을 위와 같이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로 ‘조군수趙君受’를 인명으로 해석함이 가장 타당하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지금까지 이 아회의 참가인원은 겸재가 아회의 정경을 담은 다섯 폭 중 한 폭인 ‘옥동척강玉洞陟崗’ (도 4)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7인 (이중희李仲熙 (이춘제李春躋), 조치회趙稚晦 (조현명趙顯命), 송원직宋元直 (송익보宋翼輔), 서국보徐國寶 (서종벽徐宗璧), 심시서沈時瑞 (심성진沈星鎭), 정선鄭敾, 이병연李秉淵)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 경우 위 아회기의 내용과 상충된다. 위 해제를 다시 살펴보면, 서원주인 이춘제 (이중희), 조현명 (조치회), 송익보 (송원직), 서종벽 (서국보), 심성진 (심시서), 조군수 (?), 그리고 아회(기)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아회의 정경을 화폭에 담은 겸재 정선과 시를 지어 남긴 사천 이병연 8인人이 되어야 위 기록과 일치한다. 이 경우 그림을 그린 겸재 정선이 화폭에서 빠졌음을 생각할 수 있으나 단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조군수趙君受’는 자字로 생각되는데 조趙 씨氏 성을 가진 ‘군수君受’라는 자를 사용하던 마땅한 인물을 발견할 수 없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서원주인 이춘제의 장인이자 귀록 조현명의 재종형 (6촌형)인 조원명趙遠命 (1675∼1749) (도 5 참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신할 수 없다.
다른 한 경우로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 부분의 해석을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와 약속하고 조군 (가동家僮)이 두 어른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을 받들어 모셔’ 등으로 해석을 하면 ‘옥동척강玉洞陟崗’에서 나타난 것처럼 7인의 모임과 맞아 떨어지나 좀 어색하다.
따라서 단언할 수 없으나 이춘제의 서원과 그 정자에서 기미년己未年 여름 (1739)에 이루어 졌던 아회에는 겸재와 사천을 포함한 조선시대 문인묵객 8인이 참가하였으며, 이 정경이 담긴 세 폭의 그림 ‘서원아회西園雅會’, ‘옥동척강玉洞陟崗’, ‘풍계임류楓溪臨流’에 7인의 모습만 나타난 이유는 그림을 그렸던 겸재 자신이 빠졌던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로선 타당하다 생각된다.
도 5. 이춘제 관련사항
또 하나, 다시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의 첫 문장을 보면, 귀록 조현명은 이 아회에 정식으로 초대되지 않았었고, 아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모임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흥미롭다.
이어 본격적인 아회의 모습이 나타난다. 내용을 확인하여 보자.
于時驟雨飜盆, 後晴, 登臨西園, 仍又聯袂, 雨出柴扉, 徘徊於玉流泉石, 歸鹿忽飛筇着芒, 攀崖陟嶺, 步履之捷, 不減小壯, 諸公躋後, 無不膚汙氣喘, 以俄頃之間, 乃能越巒, 而度壑, 楓溪之心庵 古亭, 倏在目下。此殆詩所謂, 終踰絶險, 曾是不意者也。
及其穿林而下, 臨溪而坐, 卽一條懸瀑, 潺溪石間。濯纓濯足, 出滌煩襟, 去之膚汙而氣喘, 咸曰 微豊原, 安得務此, 今谷之游, 實冠平生。
“그때 소나기가 내려 물이 넘쳐흘러, 개인 후에 올라 서원(소정)에 임하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좆으며 또 연몌連袂하며 시선을 나와 옥류천석에서 배회하는데 귀록이 홀연히 지팡이를 날리며 짚신을 신고 비탈을 타며 산마루를 오른다. 걸음이 빠른 것이 소장小壯에 덜하지 않아 제공이 뒤따라 오르는데 땀이 나고 숨차지 않음이 없었는데 잠깐 사이에 산등성이를 넘고 골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청)풍계의 (원)심암과 (태)고정이 홀연 눈 아래 있다. 이것은 당초 시경에 이르기를 "마침내 절험을 넘었으니 이것은 일찍이 뜻한 바가 아니다."라 한 것과 같다. 마침내 (급기) 숲을 뚫고 내려가 시내에 임하여 앉으니 곧 한 줄기 걸린 폭포가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른다. 갓끈을 빨고 갓을 씻고 답답한 가슴을 내어 씻어 땀나고 숨찬 것을 다 털어내고 나서 모두 이르기를, "풍원 (조현명)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렇게 힘쓸 수 있었겠는가? 오늘 계곡놀이는 실로 평생 으뜸일 것이다."라 하였다.”
이춘제의 후원인 서원西園과 그 정자인 서원소정西園小亭에서 이춘제를 포함한 조선시대 문인 8인이 모여 아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 소나기가 내려 정자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비가 개이자 소정小亭에 올라 아래 풍광을 굽어본 후, 사립문을 나서 옥류동 천석 사이를 배회하다 귀록 조현명이 앞장서 옥류동玉流洞에서 청풍계淸楓溪를 넘는 등산을 감행하게 된다. 등산이 꽤나 힘들었는지 "마침내 절험을 넘었으니 이것은 일찍이 뜻한 바가 아니다."라는 '시경詩經2)‘의 구절을 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웃음을 준다. 산행 후 한줄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흐르는 계곡에 앉아 갓 끈을 씻고 발을 담그고 흐른 땀을 씻어 내는 모습이 실제로 보이는 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땀을 씻어낸 후 아회 참가자 모두 풍원 (귀록 조현명) 때문에 오늘 아회가 평생에 제일이었다 말하는 제공들의 모습이 아회기의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 눈에 선하여 필자까지 시원해진다.
이어 아회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회기의 내용을 마저 살펴보자.
於亭逍遙, 竟夕忘歸, 臨罷, 歸鹿, 口呼一律, 屬諸公聯和, 請謙齋筆, 摹寫境會, 仍作帖, 以爲子孫藏, 甚奇事也, 豈可無識。
顧余 自小不好詩學, 老又有眼高手卑之症, 凡於音韻淸濁高低者不經, 與親舊挹別逢歸, 酬唱, 一切未嘗開路。故輒以此謝之, 則歸鹿, 又責之以湋詩令, 不得已 破戒塞責, 眞是肉談詩云乎哉。
己未季夏 西園主人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고,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니 그대로 시화첩 (서원아회첩)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기이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를 돌아보건대, 어려서부터 '시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이 들어서는 또 눈이 높고 손이 낮은 증세 (병)가 있어 무릇 시를 짓는데 마음을 두지 않아 친구와 만나고 헤어질 때 시를 주고받는 일에 일절 길을 연 적이 없다. 그런고로 문득 이것으로써 사양하였더니 귀록이 또 '시령'을 어긴 것을 책망한다. 부득이 파계하여 책망을 막기는 하나 참으로 이는 '육담 (육두문자)시'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기미 (1739)년 여름 서원주인3)”
계곡놀이와 탁족을 즐긴 후 정자에서 소요하며 저녁이 다되었는데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아회가 파하기 전에 귀록 조현명을 시작으로 오늘 아회의 소회所懷를 시詩로 밝힌다. 이 부분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 기記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귀록 조현명은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운을 띄우고 화답하며 시를 짓는 선비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아회’ 말 그대로 ‘우아하고 고상한 모임’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이춘제는 동석했던 화성 겸재 정선의 화필을 청하여 아회의 정경을 묘사토록 하고, 이 아회의 기록들 (시詩, 화畵) 을 그대로 모아 시화첩을 만들어 자손에게 가보로 수장하게 하려한다는 뜻을 밝힌다. 귀록의 시령에 자신 (이춘제)은 원래 ‘시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시 짓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며 피하여하다 귀록의 책망에 파계하여 시를 화답한다는 이춘제의 모습이 익살스럽고 흥미롭다.
절경의 장소에서 좋은 벗들과 함께 산행을 하고 계곡에서 탁족 등의 물놀이를 함께하고 정자에 모여 운을 띄우며 서로 시로 화답하는 모습이 정녕 그립고 아름답다. 이 평생으뜸이었던 아회가 파함을 아쉬워하며 다음에 또 만나자는 뒷기약 두며 헤어지는 모습에 여운이 느껴진다.
서원주인西園主人 이춘제의 7언율시七言律詩가 귓가에 울린다.
小園佳會偶然成,
杖屢逍遙趁晩晴,
仙閣謝煩心己靜,
雲巒耽勝脚益經,
休言溒陟勞令夕,
誇託來游冠此生,
臨罷丁寧留後約,
將軍風致老槎淸。
소원의 가회 (기쁘고 즐거운 모임) 우연히 이루어지니
지팡이 들고 짚신 신고 비 걷힌 저녁 산을 소요하네.
선객 (신선)이 번거로움 사양하니 마음 이미 고요하고
구름 산 승경 찾으니 다리 가볍네.
멀리 올라 오늘 저녁 피곤하다 말하지 말게
자랑하며 와서 논 것 (유람한 것) 이 생애 제일 (으뜸).
파함에 임해 정녕 지체하며 뒷기약 두니
장군의 풍치와 사천 노장의 맑은 뜻일세.
(歸鹿方帶將符, 且每自稱將軍故云.)
(귀록이 바야흐로 장수의 증표를 띠고, 또 매양 장군이라 자칭하기에 이렇게 읊는다.)
1) 최완수, 상동서 (현암사, 2009), p. 24.
최완수, 상동서 (범우사, 1993), p. 190.
이강호, 상동서 (삼화인쇄주식회사, 1978), p. 15.
2)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여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
황허강[黃河] 중류 주위안[中原] 지방의 시로서, 시대적으로는 주초周初부터 춘추春秋 초기까지의 것 305편을 수록하고 있다. 본디 3,000여 편이었던 것을 공자가 311편으로 간추려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하는 것은 305편이다. 시경은 풍風,아雅,송頌 셋으로 크게 분류되고 다시 아雅가 대아大雅, 소아小雅로 나뉘어 전해진다. 풍(國風이라고도 함) 은 여러 나라의 민요로 주로 남녀 간의 정과 이별을 다룬 내용이 많다. 아(雅)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儀式歌이며, 송은 종묘의 제사에서 쓰는 악시樂詩이다.
각부를 통하여 상고인上古人의 유유한 생활을 구가하는 시, 현실의 정치를 풍자하고 학정을 원망하는 시들이 많은데,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사적 평가도 높으며, 상고의 사료史料로서도 귀중하다. 원래는 사가소전四家所傳의 것이 있었으나 정현鄭玄이 주해를 붙인 후부터 ‘모전毛傳’만이 남았으며, 그때부터 《모시毛詩》라고도 불렀다. 당대唐代에는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하나가 되어 경전화하였다.
[두산백과사전]
3) 최완수, 상동서 (현암사, 2009), p. 24.
최완수, 상동서 (범우사, 1993), p. 190.
이강호, 상동서 (삼화인쇄주식회사, 1978),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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