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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회첩雅會帖의 내력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의 연원과 그 내력에 관하여 첩帖 내內에 특별히 기록된 내용은 없다. 다만 이춘제 자신이 지어 기록한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도 3)의 내용 중 이 시화첩을 만들게 된 동기를 보여주는 부분이 있어 다행히 미흡하나마 첩이 전하여 지는 과정을 추정하여 볼 수 있다. 먼저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의 내용을 알아보자.
도 3.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개인소장
(사진촬영 1975년 이영재)
西園雅會
休官以來, 病懶相成, 未窺家後小圓者, 久矣,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1), 以謀小會, 歸鹿趙台, 聞風而至。于時驟雨飜盆, 後晴, 登臨西園, 仍又聯袂, 雨出柴扉, 徘徊於玉流泉石, 歸鹿忽飛筇着芒, 攀崖陟嶺, 步履之捷, 不減小壯, 諸公躋後, 無不膚汙氣喘, 以俄頃之間, 乃能越巒, 而度壑, 楓溪之心庵 古亭, 倏在目下。此殆詩所謂, 終踰絶險, 曾是不意者也。
及其穿林而下, 臨溪而坐, 卽一條懸瀑, 潺溪石間。濯纓濯足, 出滌煩襟, 去之膚汙而氣喘, 咸曰 微豊原, 安得務此, 今谷之游, 實冠平生。於亭逍遙, 竟夕忘歸, 臨罷, 歸鹿, 口呼一律, 屬諸公聯和, 請謙齋筆, 摹寫境會, 仍作帖, 以爲子孫藏, 甚奇事也, 豈可無識。
顧余 自小不好詩學, 老又有眼高手卑之症, 凡於音韻淸濁高低者不經, 與親舊挹別逢歸, 酬唱, 一切未嘗開路。故輒以此謝之, 則歸鹿, 又責之以湋詩令, 不得已 破戒塞責, 眞是肉談詩云乎哉。
己未季夏 西園主人
“휴관이래 병과 게으름이 상성하여 집 뒤 소원(서원소정)을 들여다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는데,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 작은 모임(소회)을 도모했는데, 귀록 조대감이 소식을 듣고 이르렀다. 그때 소나기가 내려 물이 넘쳐흘러, 개인 후에 올라 서원(소정)에 임하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좆으며 또 연몌連袂2)하며 시선3)을 나와 옥류천석에서 배회하는데 귀록이 홀연히 지팡이를 날리며 짚신을 신고 비탈을 타며 산마루를 오른다. 걸음이 빠른 것이 소장小壯에 덜하지 않아 제공이 뒤따라 오르는데 땀이 나고 숨차지 않음이 없었는데 잠깐 사이에 산등성이를 넘고 골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청)풍계의 (원)심암과 (태)고정이 홀연 눈 아래 있다. 이것은 당초 시경에 이르기를 "마침내 절험을 넘었으니 이것은 일찍이 뜻한 바가 아니다."라 한 것과 같다. 마침내(급기) 숲을 뚫고 내려가 시내에 임하여 앉으니 곧 한 줄기 걸린 폭포가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른다. 갓끈을 빨고 갓을 씻고 답답한 가슴을 내어 씻어 땀나고 숨찬 것을 다 털어내고 나서 모두 이르기를, "풍원(조현명)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렇게 힘쓸 수 있었겠는가? 오늘 계곡놀이는 실로 평생 으뜸일 것이다."라 하였다.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고,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니 그대로 시화첩(서원아회첩)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기이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를 돌아보건대, 어려서부터 '시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이 들어서는 또 눈이 높고 손이 낮은 증세(병)가 있어 무릇 시를 짓는데 마음을 두지 않아 친구와 만나고 헤어질 때 시를 주고받는 일에 일절 길을 연 적이 없다. 그런고로 문득 이것으로써 사양하였더니 귀록이 또 '시령'을 어긴 것을 책망한다. 부득이 파계하여 책망을 막기는 하나 참으로 이는 '육담(육두문자)시'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기미(1739)년 여름 서원주인4)”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의 후반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於亭逍遙, 竟夕忘歸, 臨罷, 歸鹿, 口呼一律, 屬諸公聯和, 請謙齋筆, 摹寫境會, 仍作帖, 以爲子孫藏, 甚奇事也, 豈可無識。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고,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니 그대로 시화첩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기이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춘제李春躋의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이 문장에 의하면, 이러한 아회雅會가 이루진 일이 매우 신기한 일이기 때문에 아회에 관한 기록을 남김에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대감이 먼저 시 한수를 지어 읊고 이춘제를 비롯한 참가자 전원에게 시 짓기를 권했던 모양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우리 조선시대朝鮮時代 사대부들의 멋들어진 풍류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에 참가자 전원이 시를 여러 편 지어 남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이춘제는 동석했던 겸재謙齋 정선鄭敾에게 정중히 청하여 또한 이 아회의 모습과 정취를 빼어난 다섯 폭의 화폭5)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이어 이춘제는 아회를 통한 이 시들과 그림들을 그대로 시화첩詩畵帖으로 꾸며 가보家寶로 자손들(후손들)에게 물려주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위 이춘제李春躋의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내용대로, 이 시화첩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은 1970년 대 까지 이춘제의 후손後孫 가家에 전해진다. 후손 가에 전해지던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은 이 후 1975년 모운茅雲 이강호李康灝 (1899~1980)6)의 집안으로 전하여 지게 되는데, 얼마 후 다시 이춘제 후손인 이모 씨氏7)의 요청으로 첩의 제일 첫 그림이었던 《서원아회도西園雅會圖》를 제외한 겸재 정선의 그림 4폭 (옥동척강玉洞陟崗, 풍계임류楓溪臨流, 서원소정西園小亭, 한양전경漢陽全景)과 귀록 조현명과 사천 이병연의 시서詩書 각 1점을 뺀 모든 시詩와 기記들은 다시 이춘제 후손가로 돌아가게 된다.8)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내內의 그림들과 두 편의 시가 뜯어지게 되었는데 이에 모운茅雲 장丈9)께서 애석해 하셨다 한다. 이 뜯어진 그림들과 시서 두 편은 모암문고茅岩文庫 (The Moam Collection, Korea)를 포함한 각 개인에 전하고 있다.
4) 최완수, 상동서 (현암사, 2009), p. 24.
최완수, 상동서 (범우사, 1993), p. 190.
이강호, 상동서 (삼화인쇄주식회사, 1978), p. 15.
이재서 李載瑞, 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전 여의도 성모병원장 간산干山 정환국鄭煥國 (1922~1999) 등과 평생 교유하였다. 고서화 감식에 명망이 높아 1943년 위당爲堂(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그 정취를 극히 찬양하여 1943년 ‘모운茅雲’이라는 호와 10폭 대작 병장을 서봉하였다. 이
병장이 지금까지 모암문고茅岩文庫에 전한다.
이강호,《고서화古書畵》(삼화인쇄주식회사, 1978)
Yong-Su Lee, Art Museums - Their History, Present Situation and Vision: The Case of the
Republic of Korea(Chicago: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2007), p. 60.
7) 이미 고인이 되셨겠지만 결례가 될 수 있어 이춘제 후손인 이모李某 씨氏의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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