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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의 교육철학] 퇴계 이황

Moam Collection 2010. 11. 20. 01:59

[옛 선비의 교육철학] 퇴계 이황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 겸재 정선 등, 『퇴우이선생진적』 중 「회암서절요 서」, 보물 585호, 모암문고The Moam Collection 소장 

 

 

옛 선인들의 말씀 중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큰 글들이 적지 않다. 위 『퇴우이선생진적』 중 「회암서절요 서」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자.

 

晦菴書節要序 


晦菴朱夫子。挺亞聖之資。承河洛之統。道巍而德尊。業廣而功崇。其發揮經傳之旨。以幸敎天下後世者。旣皆質諸鬼神而無疑。百世以俟聖人而不惑矣。夫子旣沒。二王氏及余氏。裒粹夫子平日所著詩文之類。爲一書。名之曰朱子大全。總若干卷。而其中所與公卿大夫門人知舊往還書札。多至四十有八卷。然此書之行於東 方。絶無而僅有。故士之得見者蓋寡。嘉靖癸卯中。我中宗大王。命書館印出頒行。臣滉於是。始知有是書而求得之。猶未知其爲何等書也。因病罷官。載歸溪上。得日閉門靜居而讀之。自是。漸覺其言之有味。其義之無窮。而於書札也。尤有所感焉。蓋就其全書而論之。如地負海涵。雖無所不有。而求之難得其要。至於書札。則各隨其人材稟之高下。學問之淺深。審證而用藥石。應物而施爐錘。或抑或揚。或導或救。或激而進之。或斥而警之。心術隱微之間。無所容其纖 惡。義理窮索之際。獨先照於毫差。規模廣大。心法嚴密。戰兢臨履。無時或息。懲窒遷改。如恐不及。剛健篤實輝光。日新其德。其所以勉勉循循而不已者。無間於人與己。故其告人也。能使人感發而興起焉。不獨於當時及門之士爲然。雖百世之遠。苟得聞敎者。無異於提耳而面命也。嗚呼至矣。顧其篇帙浩穰。未易究觀。兼所載弟子之問。或不免有得有失。滉之愚竊不自揆。就求其尤關於學問而切於受用者。表而出之。不拘篇章。惟務得要。乃屬諸友之善書者及子姪 輩。分卷寫訖。凡得十四卷爲七冊。蓋視其本書。所減者殆三之二。僭妄之罪。無所逃焉。雖然。嘗見宋學士集。有記魯齋王先生以其所選朱子書。求訂於北山何先生云。則古人曾已作此事矣。其選其訂。宜精密而可傳。然當時宋公。猶嘆其不得見。況今生於海東數百載之後。又安可蘄見於彼。而不爲之稍加損約。以爲用工之地也哉。或曰。聖經賢傳。誰非實學。又今集註諸說。家傳而人誦者。皆至敎也。子獨拳拳於夫子之書札。抑何所尙之偏而不弘耶。曰。子之言似矣。 而猶未也。夫人之爲學。必有所發端興起之處。乃可因是而進也。且天下之英才。不爲不多。讀聖賢之書。誦夫子之說。不爲不勤。而卒無有用力於此學者。無他。未有以發其端而作其心也。今夫書札之言。其一時師友之間。講明旨訣。責勉工程。非同於泛論如彼。何莫非發人意而作人心也。昔聖人之敎。詩書禮樂皆在。而程朱稱述。乃以論語爲最切於學問者。其意亦猶是也。嗚呼。論語一書。旣足以入道矣。今人之於此。亦但務誦說。而不以求道爲心者。爲利所誘奪也。 此書有論語之旨。而無誘奪之害。然則將使學者。感發興起。而從事於眞知實踐者。舍是書何以哉。夫子之言曰。學者之不進。由無入處而不知其味之可嗜。其無入處。由不肯虛心遜志。耐煩理會。使今之讀是書者。苟能虛心遜志。耐煩理會。如夫子之訓。則自然知其入處。得其入處。然後知其味之可嗜。不啻如芻豢之悅口。而所謂大規模嚴心法者。庶可以用力矣。由是而旁通直上。則泝伊洛而達洙泗。無往而不可。向之所云聖經賢傳。果皆爲吾之學矣。豈偏尙此一 書云乎哉。滉年薄桑楡。抱病窮山。悼前時之失學。慨餘韻之難理。然而區區發端。實有賴於此書。故不敢以人之指目而自隱。樂以告同志。且以俟後來於無窮云。嘉靖戊午夏四月日 (後學眞城李滉) 謹序。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 서序, 晦菴 朱夫子는 亞聖의 자질로 태어나 河洛의 계통을 이었는데 도는 우뚝하고 덕은 높으며, 공업攻業이 뛰어나고 위대하였다. 또 그가 경전經傳의 지취(뜻)를 발휘하여 천하 후세를 가르친 것은 실로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을 것이다. 부자께서 별세한 뒤에 두 왕씨王氏와 여씨余氏가 부자께서 평소에 저술한 시문들을 모아 한 책을 만들고 주자대전朱子大全이라고 이름붙이니 총 약간 권이 되었다. 그 중에 공경대부와 문인 및 아는 친구들과 왕복한 서찰이 자그마치 48권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나라에 유행하는 것이 아주 없거나 겨우 조금 있었을 뿐이므로 얻어 본 선비는 적었다.


嘉靖 계묘년(1543년)에 우리 中宗大王께서 교서관에 명하여 인쇄해서 반포하게 하였다. 이에 신 황滉은 비로소 이런 책이 있는 줄을 알고 구하여 얻었으나 아직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책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 잇따라 병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계상溪上으로 돌아와 날마다 문을 닫고 조용히 거처하며 읽어보았다. 이로부터 점점 그 말에 맛이 있음과 그 뜻이 무궁한 것을 깨달았는데, 그 서찰에 있어서는 더욱 느끼는 바가 있었다. 대체로 그 책 전체를 두고 논한다면 지구가 넓고 바다가 깊은 것과 같이 없는 것이 없으나, 구해 보아도 그 요점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서찰에 있어서는 각기 사람들의 재품材稟1)의 고하와 학문의 얕고 깊음에 따라 증세를 살펴 약을 쓰며 사물에 따라 저울로 다는 듯이 알맞게 하였다. 혹은 억제시키거나 앙양시키며 혹은 인도하거나 구원하며 또는 격려하여 진취시키기도 하고 배척하여 경계시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심술의 은미한 사이에 작은 惡이라도 용납될 수 없게 하였고, 의리를 캐내고 찾을 때에는 조그마한 차이점도 먼저 비춰 주었다. 그리하여 그 규모가 광대하고 심법이 엄밀하며, 마치 위험한 낭떠러지에 선 듯, 여린 살얼음을 밟듯 조심하면서 혹시라도 쉬는 때가 없게 하였다. 악을 징계하여 막고 허물 고치기를 미치지 못하는 듯이 두려워하며, 강건하고 독실하여 그 빛이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힘쓰고 따르면서 그치지 않는 것은 남과 자신이 간격이 없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가 남에게 고해 주면 능히 남으로 하여금 감동되어 흥기토록 하였다.


당시 문하에 있던 선비들만 그랬을 뿐 아니라 비록 백세의 먼 훗일이라도 그 가르침을 듣는 자는, 귀에 대고 말하며 직접 대해 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 지극하도다. 그런데 돌아보면 책의 규모가 광대하여 다 살펴보기가 쉽지 않고 등제된 제자들의 문답에도 혹 득실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나 황의 어리석음으로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 중에서 더욱 학문에 관계되고 쓰임에 절실한 것을 찾아 표시하였는데 편篇이나 장章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요점을 얻기에 힘썼다. 마침내 여러 벗 중에서 글씨를 잘 쓰는 자와 자질들에게 부탁하여 책을 나누어 필사하게 하였다. 이를 마치니 모두 14권 7책이 되었는데 본래의 책에 비교하여 감해진 것이 거의 3분의 2나 되었으니 외람되고 망령된 죄는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송학사집宋學士集을 보니 그 기록에 “노재魯齋2)왕선생王先生이 그가 뽑은 주자의 글을 가지고 북산北山 하선생河先生에게 교정을 구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옛사람이 벌써 이 일을 했던 것이며, 그 뽑고 교정한 것이 정밀하여 전해질만 한 것인데도 당시의 송공도 얻어볼 수 없음을 오히려 한탄하였다. 더구나 지금 이 나라에서 수백 년 뒤에 태어났는데도 어찌 그것을 구해보고 좀 더 간략하게해서 공부하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聖經과 賢傳은 어느 것인들 실학이 아니겠는가? 또한 지금 여러 집주集註의 학설로서 집집마다 전하고 사람마다 읽는 것이 모두 지극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그대홀로 부자의 서찰에만 알뜰하니 어찌 그 숭상하는 바가 한쪽에 치우치고 넓지 못한가?” 하였다. 나는 대답하였다. 자네가 말이 그럴듯하나 그렇지 않다. 대체로 사람이 학문을 함에는 단서를 발견하고 흥기되는 곳이 있어야만·이로 인해 진보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천하의 영재가 적지 않으며, 성현의 글을 읽고 부자의 학설을 외우기에 힘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러한 학문에 힘쓰는 자가 없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단서를 발견하여 그 마음을 진작시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서찰에 있는 말은 그 당시의 사우들 사이에 좋은 비결을 강론하여 밝히고 공부에 힘쓸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저들과 같이 범연하게 논한 것과는 다르고 어느 것이나 사람의 뜻을 발견하고 사람의 마음을 진작시키지 않는 것이 없다.


옛날 성인의 가르침에 예禮․ 악樂․ 시詩․ 서書가 모두 있다. 그런데 정자程子3)와 주자는 이를 칭송하고 기술함에 있어 마침내 논어論語를 가장 학문에 절실한 것으로 삼았으니 그 뜻은 역시 이 때문이었다. 아! 논어 한가지의 한 책으로도 도道에 들어갈 수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여기에 있어 학설을 외우고 (입으로만) 떠들기에 힘쓸 뿐 도道(를)구하기에 마음을 쓰지 않으니 이것은 이익의 꾀임에 빠진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에는 논어의 뜻은 있지만 꾀임에 빠지는 해독은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느끼고 흥기되게 하여, 참으로 알고 실천하도록 하는 데는 이 글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부자의 말씀에 이르기를 “학자가 진보되지 못하는 것은 들어갈 곳이 없어 그 맛을 즐길만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들어갈 곳이 없다는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자로 하여금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며 번거로움을 참고 깨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자로 하여금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며 번거로움을 견디고 깨닫게 하기를, 부자의 가르침처럼 한다면 자연히 들어갈 곳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들어갈 곳을 얻게 된 뒤이면 그 맛의 즐길만한 것임을 아는 것이 맛난 음식이 입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닐 것이다. 또 이른바 규모를 크게 하고 심법을 엄하게 하는 것에도 거의 힘쓸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널리 통하여 곧바로 올라간다면 이락伊洛4)에 소급되고 수사洙泗5)에 달하게 되어 어디로 가나 불가함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 말한 성경과 현전이 사실은 모두 우리의 학문인 것이다. 어찌 이 한 책만을 치우치게 숭상한다 할 수 있겠는가? 황은 나이 늙었고 병들어 궁벽한 산중에 있으면서 전에 배우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성인의 여운을 깨닫기 어려움을 개탄하였다. 그런데 구구하게 단서를 발견하였던 것은 실로 이 글에 힘입었음이 있었다. 그래서 감히 남이 지목하는데도 숨기지 못하고 즐거이 동지들에게 고하며 또한 무궁한 후세에 공론을 기다린다.


가정嘉靖 무오년戊午年 (1558년) 4월에 (후학 진성 이황) 삼가 씀”6)

 

 

특히 한 단락에 눈길이 간다.

 

"嘉靖 계묘년(1543년)에 우리 中宗大王께서 교서관에 명하여 인쇄해서 반포하게 하였다. 이에 신 황滉은 비로소 이런 책이 있는 줄을 알고 구하여 얻었으나 아직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책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 잇따라 병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계상溪上으로 돌아와 날마다 문을 닫고 조용히 거처하며 읽어보았다. 이로부터 점점 그 말에 맛이 있음과 그 뜻이 무궁한 것을 깨달았는데, 그 서찰에 있어서는 더욱 느끼는 바가 있었다. 대체로 그 책 전체를 두고 논한다면 지구가 넓고 바다가 깊은 것과 같이 없는 것이 없으나, 구해 보아도 그 요점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서찰에 있어서는 각기 사람들의 재품材稟1)의 고하와 학문의 얕고 깊음에 따라 증세를 살펴 약을 쓰며 사물에 따라 저울로 다는 듯이 알맞게 하였다. 혹은 억제시키거나 앙양시키며 혹은 인도하거나 구원하며 또는 격려하여 진취시키기도 하고 배척하여 경계시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심술의 은미한 사이에 작은 惡이라도 용납될 수 없게 하였고, 의리를 캐내고 찾을 때에는 조그마한 차이점도 먼저 비춰 주었다. 그리하여 그 규모가 광대하고 심법이 엄밀하며, 마치 위험한 낭떠러지에 선 듯, 여린 살얼음을 밟듯 조심하면서 혹시라도 쉬는 때가 없게 하였다. 악을 징계하여 막고 허물 고치기를 미치지 못하는 듯이 두려워하며, 강건하고 독실하여 그 빛이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힘쓰고 따르면서 그치지 않는 것은 남과 자신이 간격이 없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가 남에게 고해 주면 능히 남으로 하여금 감동되어 흥기토록 하였다."

 

이 단락의 요점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 될 수 있다.

 

"그러나 서찰에 있어서는 각기 사람들의 재품材稟1)의 고하와 학문의 얕고 깊음에 따라 증세를 살펴 약을 쓰며 사물에 따라 저울로 다는 듯이 알맞게 하였다."

 

즉 각 사람의 재주와 품성, 학문의 수준 등에 맞게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즈음 말하는 '맞춤형 교육'을 이름이다.

 

이렇듯 옛 현인들의 말씀을 읽고 살펴보다 보면 그 높고 깊은 철학에 근본을 둔 혜안과 안목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퇴계 선생의 맑은 음성이 귓가를 울리며 가슴에 사무친다. 

 

"아! 논어 한가지의 한 책으로도 도道에 들어갈 수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여기에 있어 학설을 외우고 (입으로만) 떠들기에 힘쓸 뿐 도道(를)구하기에 마음을 쓰지 않으니 이것은 이익의 꾀임에 빠진 때문이다."

 



1) 재주와 품성.


 

2) 宋나라 王栢의 호. 자는 회지會之이며 저서에 독역기讀易記 등 다수가 있다. 宋史 438권.


 

3)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頥 형제를 높여 이르는 말.


 

4) 두 선생 정자程子가 이수伊水와 낙수 洛水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낙수는 정자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5)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일컫는 것으로 이곳에서 공자가 도道를 강론하였다 전한다.


 

6) 퇴계학연구원 편《국역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심산문화사, 2001), p. 1~6; pp. 一~二 참조.

    김시황, 윤무학 편, 《퇴계학논총 제 10 권》‘주자서절요서’(장순범 역)

    위 글을 참조하였고 《퇴계학논총 제 10 권》내 오자를 바로잡고(위 논문 각주 (5) ‘落水’를 ‘洛水’로) 글의

    부분을 수정하여 실었다.

    이 원문과 달리 제자들에 의하여 선생사후에 간행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서序》에는 “가정嘉靖 무오년戊

    午年(1558년) 4월에 ‘후학 진성 이황’ 삼가 씀”이라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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