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양전경漢陽全景>-1
도 7. 겸재謙齋 정선鄭敾,《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중〈한양전경漢陽全景〉(경신년庚申年, 1740), 견본담채絹本淡彩, 67.5 x 40.0cm, 모암문고 소장
<한양전경漢陽全景>도는 겸재謙齋 65세 (만 64세)시 경신년庚申年 (영조 16년, 1740)에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내內 그려 넣으신 두 폭의 진경산수인물화 중 한 폭으로, 아회첩 약 40면 중 중간 면 <서원소정西園小亭>도 뒤 두면에 걸쳐 그려져 있던 작품이다.
<한양전경>도는 앞서 살펴보았던 <서원소정>도와 함께 조선시대朝鮮時代 사대부士大夫 문인묵객文人墨客 8인人이 당시 지신사知申事로 있던 이춘제의 집 후원인 ‘서원’과 그 정자 ‘서원소정’에서 가졌던 아회 1년 후 그려진 그림이라 생각되는데 이 그림 역시 다음 해가 되는 이춘제의 지비(지)년을 기념하여 집안의 가보로 후손에게 물려줄 아회첩 (서원아회첩)의 완성을 위하여 겸재 정선에게 정중히 부탁하여 그려진 그림이라 생각된다. <한양전경漢陽全景>도를 바라보면 먼저 그 광활한 스케일에 압도된다. 또 이 그림은 겸재의 다른 대작들에 비하여 그리 크지 않은 화폭에 이춘제가 자신의 후원 정자 ‘서원소정’에 앉아 경복궁景福宮, 사직단社稷壇, 인경궁仁慶宮 을 비롯하여 남산南山, 관악산冠岳山, 남한산성南漢山城에까지 이르는 한양전경漢陽全景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한 화면에 한 나라의 수도 전경을 그린 그림은 이 <한양전경>도가 유일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감히 말하자면 현재 전하는 겸재 정선의 유작들 중 최고의 수작이라 할만하다.
그림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후원인 ‘서원’과 그 정자 ‘서원소정’의 주인이자 《서원아회첩》을 꾸민 이춘제에 관하여 알아보자.
“이춘제李春躋
1692년 (숙종 18)∼1748년 (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희仲熙. 본관은 전주全州. 부친은 이언경李彦經이고 조부는 이정린李廷麟이다.
1717년 (숙종 4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 (영조 4) 사헌부집의에 배수되고, 1731년 진위겸진향정사進慰兼進香正使양평군陽平君 장檣을 따라 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6년 비변사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사판仕版1)에서 영구히 삭제시킬 것을 요청하였으나 영조의 배려로 화를 면하였다.
그 뒤 지돈령부사에 임명되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이상이 ‘네이트 (NATE) 한국학’과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등에 실려 있는 ‘이춘제’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내용이 매우 빈약하고 잘못된 부분이 눈에 띈다. 이춘제의 몰년은 1748년이 아니라 1761년이 되어야 옳다. 필자의 조사내용을 토대로 이춘제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춘제李春躋
1692년 (숙종 18)∼1761년 (영조 3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희仲熙. 본관은 전주全州. 부친은 이언경李彦經이고 조부는 이정린李廷麟이다.
1717년 (숙종 4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3 계묘년 (경종 3년)에 정언正言을 시작으로 1728년 (영조 4) 사간司諫, 1729년 (영조 5년) 집의(執義에 배수되고, 1731년 진위겸진향정사進慰兼進香正使양평군陽平君 장檣을 따라 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후 1733년 (영조 9년) 대사간, 1737년 (영조 13년) 도승지, 1745년 (영조 21년) 판윤判尹, 1746년 (영조 22년) 동의금同義禁2), 대사헌 (1748, 영조 24년), 형조판서 (1749, 영조 25년), 공조판서 (1751, 영조 27년), 이 후 형조판서, 대사헌 등 두루 요직을 겸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그의 졸기卒記가 전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국조문과방목國
朝文科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참조]”
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그의 졸기를 살펴보자.
英祖 九十八卷, 三十七年 (辛巳/乾隆 二十六年) 十月 九日 (甲戌)
知敦寧李春躋卒。 春躋爲人輕淺, 行事鄙瑣, 街兒輿卒, 見則指笑, 稱以春躋大監, 其見侮於人, 可知也。
“영조 98권, 37년 (1761 신사 / 건륭 26년) 10월 9일 (갑술)
지돈녕 이춘제(李春躋)가 졸(卒)하였다. 이춘제는 사람됨이 경망하고 천박하며, 일을 행함이
야비하고 잗달아서 길거리의 아이와 여졸(輿卒)들이 그를 보면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면서 춘
제 대감이라고 지칭하였으니, 그가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을 알 만하다.”
이춘제의 졸기 내용을 살펴보니 당황스럽다. 다시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춘제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니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띈다.
景宗 十四卷, 四年 (甲辰/雍正 二年) 四月 二十四日 (丁卯)
上自卽位以來, 群臣論事章奏, 輒留中不報, 事過之後, 始還下政院。 時以追報之議, 斯文之說, 討逆之論, 縉紳、章甫, 章交公車, 時議以爲上之一切報罷, 反爲鎭定之道。 至是, 又以左副承旨洪重禹、右承旨權以鎭、吏曹參判金一鏡、慶尙道進士李德標等三千六百十一人、京畿等五道儒生鄭夏復等三百三十人、尹俔等八百五十人、京居生員李箕重等一百五人、忠淸道幼學李夢寅等六百五人、京畿幼學權瑞鳳等一百五十二人、公山幼學禹龜瑞、連山幼學金泰源等、忠淸道幼學洪潝等二百十六人、正言成德潤、司果金重熙、司勇蔡之洪、知敦寧洪致中、咸原府院君魚有龜、禮曹參判金一鏡、刑曹判書金一鏡、副提學李師尙、大司諫金東弼、戶曹參議金東弼、楊州幼學趙宗世、前府使魚有鳳等、獻納權益寬、正言李匡世、修撰宋眞明、戶曹參議權重經、刑曹判書趙泰億、及第朴弼正等、校理李承源、昌恩正權等、戶曹參判李眞儉、忠淸監司尹惠敎、吏曹判書李光佐、左參贊姜鋧、校理李顯章、修撰李顯章、應敎尹淳、晋州幼學姜鳳儀、校理吳命新ㆍ尹游、修撰呂善長等、輔德李眞淳、京畿幼學金行進等六十二人、兼司書尹聖時、副應敎權益寬、副提學李眞儒、司諫柳弼垣、持平申致雲等、吏曹參議李眞望、副校理尹聖時、修撰李顯章、持平李普昱、司諫李濟、大司憲朴泰恒、大司諫李廷濟、副修撰李顯章、掌令宋宅相、司書金尙星、承旨李宜晩、獻納宋眞明、正言柳儼、正言尹恕敎、持平李春躋、副提學李師尙、獻納沈埈、檢閱曺命敎、司諫尹會、昌山君相等疏七十本, 下政院。 一鏡最初疏論頤命、昌集, 宜遣使莅斬事, 以爲: “逆者, 天下之極惡, 而人類之窮兇, 若其行匈肆惡, 不一其謀。 夜半懷刃, 有若魯之鍾巫, 食中置毒, 有若漢之冀、顯, 乘喪矯制, 有若奏之斯、高, 謀劃陰秘, 情節凶慘。 苟有一分人心, 莫不欲戮殘魄斬朽骨於千載之下。 雖然斯、高未有冀、顯之惡, 冀、顯未有鍾巫之犯。 通萬古之逆, 泝而計之, 未有若今日逆黨之窮凶極惡者。 今日國家無法則已, 若果有法, 頤命、昌集, 安敢戴其頭而一日假息於天地之間也? 衆證俱成, 厥罪孔彰, 旣無更問之端, 何有可覈之情? 急遣金吾郞, 行到所遇之地, 卽令莅斬兩賊, 揆諸法理, 允爲得當。 今國家草創, 人心危懼, 安知不逆望之外, 復有劇賊, 潛伏肘腹, 逆魁至京, 凶焰倐熾, 不測陰謀, 靡有所屆也哉?” 蓋一鏡忌世弟英明, 欲以逆獄誣逼而危動之者, 乃其本計, 而三手之謀, 出於頣、集之子弟門客, 在頣、集則容或有與知之理矣。 今因論頣、集之罪, 而忽引魯桓公鍾巫事, 形諸章奏, 公肆誣汚, 凶肚逆腸, 蓋已畢露, 不待於敎文蹀血等語, 而擧朝喑嗚, 莫能顯言誅斥聲罪, 致討始在甲辰以後, 嗚呼! 晩矣。(중략)
“임금이 즉위한 이래 뭇 신하의 논사장주論事章奏를 번번이 궁중에 머물러 두고 회답하지 않은 채 일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승정원으로 내려 보냈다. 그때는 추보追報에 대한 논의, 사문斯文에 관한 송사, 토역討逆에 대한 논의 등으로 해서 진신縉紳·장보章甫들이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렸는데, 당시 의논들은 임금이 일체 회답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진정시키는 길이라고도 하였다. 이때 와서 또 좌부승지 홍중우洪重禹, 우승지 권이진權以鎭, 이조 참판 김일경金一鏡, 경상도 진사進士 이덕표李德標 등 3천 6백 11명, 경기 등 5도의 유생 정하복鄭夏復 등 3백 30명, 윤현尹俔 등 8백 50명, 서울에 거주하는 생원生員 이기중李箕重 등 1백 5명, 충청도 유학幼學 이몽인李夢寅 등 6백 5명, 경기 유학 권서봉權瑞鳳 등 1백 52명, 공산公山 유학 우귀서禹龜瑞, 연산連山 유학 김태원金泰源 등과 충청도 유학 송흡洪潝 등 2백 16명, 정언 성덕윤成德潤, 사과司果 김중희金重熙, 사용司勇 채지홍蔡之洪, 지돈녕 홍치중洪致中,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 예조 참판 김일경金一鏡, 형조 판서 김일경, 부제학 이사상李師尙, 대사간 김동필金東弼, 호조 참의 김동필, 양주楊州 유학 조종세趙宗世, 전 부사府使 어유봉魚有鳳 등과, 헌납 권익관權益寬, 정언 이광세李匡世, 수찬 송진명宋眞明, 호조 참의 권중경權重經, 형조 판서 조태억趙泰億, 급제及第, 박필정朴弼正 등과, 교리 이승원李承源, 창은정昌恩正 이권李權 등과, 호조 참판 이진검李眞儉, 충청 감사 윤혜교尹惠敎, 이조 판서 이광좌李光佐, 좌참찬 강현姜鋧, 교리 이현장李顯章, 수찬 이현장, 응교 윤순尹淳, 진주晉州 유학 강봉의姜鳳儀, 교리 오명신吳命新·윤유尹游, 수찬 여선장呂善長 등과, 보덕輔德 이진순李眞淳, 경기 유학 김행진金行進 등 62명과, 겸사서兼司書 윤성시尹聖時, 부응교 권익관權益寬, 부제학 이진유李眞儒, 사간 유필원柳弼垣, 지평 신치운申致雲 등과, 이조 참의 이진망李眞望, 부교리 윤성시尹聖時, 수찬 이현장李顯章, 지평 이보욱李普昱, 사간 이제李濟, 대사헌 박태항朴泰恒, 대사간 이정제李廷濟, 부수찬 이현장, 장령 송택상宋宅相, 사서司書 김상성金尙星, 승지 이의만李宜晩, 헌납 송진명宋眞明, 정언 유엄柳儼, 정언 윤서교尹恕敎, 지평 이춘제李春躋, 부제학 이사상李師尙, 헌납 심준沈埈, 검열檢閱 조명교曹命敎, 사간 윤회尹會, 창산군昌山君 이상李相 등의 소疏 70본本을 승정원에 내려보냈다. 김일경金一鏡의 최초의 상소上疏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은 사신을 보내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야 한다는 일을 논하고 말하기를,
“역적이란 것은 천하의 극악極惡이자 인류의 궁흉窮凶인데, 그가 흉계를 행하고 악독을 부리는 데는 모략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야반夜半에 칼을 품은 일은 마치 노魯나라의 종무鍾巫와 같았고, 음식물에 독약을 넣은 일은 마치 한漢나라의 양기梁冀·염현閻顯과 같았으며, 국상國喪을 틈타서 왕명을 사칭한 일은 마치 진奏나라의 이사李斯·조고趙高 와 같았으니, 그의 은밀한 모략과 흉악한 정상으로 볼 때 참으로 일분의 인정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천 년을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같이 그의 시든 넋을 뭉개고 썩은 해골을 베고자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사·조고가 양기·염현만큼 악독하지 않았고 양기·염현이 종무만큼 범죄가 크지 않았으니, 만고의 역적들을 통합하여 거슬러 올라가 헤아려 보아도 오늘날의 역적 무리처럼 지극히 흉악한 자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국가에 법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만약 법이 있다면 이이명·김창집이 어찌 감히 하루라도 그 머리를 이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뭇사람의 증거가 모두 성립되고 그 죄상이 분명히 드러나서 이미 다시 더 신문할 단서가 없는데 사핵할 만한 정상이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속히 금오랑金吾郞을 파견하여 가다가 그 자리에서 즉시 두 역적을 베도록 하는 것이 법리法理로 헤아려 볼 때 진실로 타당할 듯합니다. 오늘날 국가가 혁신하여 인심이 불안해하고 있는데, 역망逆望이 아닌 외에 또 다시 극렬한 역적이 지극히 가까운 곳에 몰래 잠복하고 있다가 역괴逆魁가 서울에 도착하면 또다시 흉역의 불꽃이 갑자기 치솟아 헤아릴 수 없는 그 음모가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하였다.
대개 김일경이 세제世弟가 영명英明한 것을 꺼린 나머지 역옥逆獄한 일을 가지고 무고해 핍박하여 위협으로 충동질하려는 것이 곧 그 본래의 계획이었는데, 삼수三手의 계획이 이이명·김창집의 자제子弟 내지 문객門客 가운데서 나왔고 보면, 이이명·김창집으로서는 어쩌면 그 일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제 와서 이이명·김창집의 죄를 논하면서 갑자기 노魯나라 환공桓公 때의 종무鍾巫 사건을 장주章奏에 끌어대면서 공공연히 모함을 하였으니, 그 흉역凶逆의 심장이 이에서 이미 다 드러난지라, 교문敎文 속에 ‘사람을 죽여 흥건하게 흐르는 피를 밟는다.’라는 등의 말을 더하지 않고도 온 조정이 소리 없이 상심하고 탄식하면서도 능히 드러내놓고 배척하지 못하다가 그의 성토聲討가 갑진년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있었으니, 아! 너무 늦었도다. (중략)”
위 《조선왕조실록》 기사는 경종 대 올려진 상소의 기록을 담고 있는데, 신임사화3)에 연루 된 이이명과 김창집을 죽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4). 이에 김창집은 신임사화가 일어난 후 1년 뒤 유배지 거제도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 소장을 함께 올린 이들을 살피다 보니 당시 지평이었던 이춘제의 이름이 눈에 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 김창집은 사천 이병연과 겸재 정선의 스승이었던 삼연 김창흡의 형이었으며, 젊은 시절 겸재 정선은 김창집의 천거로 화원과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위 기록들을 살피며 어떻게 겸재와 사천이 자신들의 스승을 죽이라 소했고 당대의 평이 별로 좋지 않았던5) 이춘제의 아회에 참가하여 그것도 겸재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한양전경〉 그림과 시를 주었는지 의문이 든다. 이춘제와 인왕곡 지척에 살고 1731년 진위겸진향사부사로 연경으로 떠나는 이춘제 일행을 서대문 밖 보화관 부근에서 전별하는 장면을 그린 <서교전의西郊餞儀>를 남긴6) 겸재야 그렇다 치고 골수 노론집안인 사천 이병연의 아회 참가가 약간 의외이다. 지기인 겸재 정선의 청도 아회 참가의 한 이유였겠지만 아마도 우리의 상상 그 이상으로 당시 이춘제의 위세가 대단했었던 것이 이춘제의 청을 거절치 못한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2) 동지의금부사. 조선 세조 때 의금부에 설치한 종2품의 관직. 조선시대 의금부에서 지사(知事)를 도와주는 보좌역으로 다른 직책과 겸직할 수 있었다.
1414년(태종 14)에 의용순금사가 의금부로 개편되었으나 이때는 동지의금부사가 없었고 1466년(세조 12) 의금부의 직제를 판사(判事), 지사 다음의 직책으로 동지의금부사를 설치한다고 《경국대전》에 전해진다.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맡았고 정원은 4명이다.
[두산백과사전]
3) 본고 각주 48 참조.
4) 이 기사의 본 내용은 ‘이이명과 김창집’을 죽이라는 상소는 모함이었다는 내용이다.
5) 《조선왕조살록》이춘제의 졸기 참조.
6) 그림 값을 후하게 주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고 또한 당색 등에 편벽지지 않고 여러 문인들과 두루 넓은 교우를 가졌던 겸재의 인성도 그 한 연유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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