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아회첩

III_2.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

Moam Collection 2010. 11. 29. 00:37

2.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

 


도 2.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 (경신년庚申年 여름, 1740), 개인소장, (사진촬영 1975년 이영재)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는 서원아회西園雅會가 이루어졌던 그 다음해 여름 (경신년庚申年, 1740) 이춘제가 편지로 자신의 집 후원後園 정자인 ‘서원소정西園小亭’의 이름을 택하여달라는 부탁을 받은 귀록 조현명이 이에 답하여 보내준 글이다.


먼저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의 내용을 알아보자.


  西園小亭記


李仲熙 西園之亭, 占北山佳處, 溪壑 窈以深, 面界 敞以豁左右 古松森然, 卽其中, 級之爲階, 而花竹列焉, 坎之爲池, 而菱芡被焉。位置甚整, 妙有韻致, 沿北山一帶, 蓋多名園勝林, 而獨仲熙之亭, 擅其勝絶焉。

一日 仲熙書來, 以爲斯亭之成, 適在吾知非年, 故或名之爲四九, 以且在洗心臺, 玉流洞之間, 故或明之爲先玉, 子其擇焉。

余復之曰, 四十知非, 雖君子所以進德者, 然其於名斯亭也, 汎以不切, 玉流 洗深, 顧卽足, 以重斯亭也。余嘗登子之亭, 而賦詩曰, 槎川佳句 謙齋畵, 左右招邀作主人, 亭之名, 在是矣。

夫李杜之詩, 顧陸之畵, 名於天下。然其生也, 落落相先後, 不與之同時竝峙, 雖以香爐之瀑, 洞庭之樓, 有詩而無畵, 此千古勝地之恨也。

今槎川謙齋氏之詩與畵, 俱可爲 妙絶於一世, 而其所居, 皆不遠於子之亭也。夫以斯亭之勝, 又幸隣於二氏, 日以杖屢, 相周施於一席, 殆若左李杜, 而右顧陸。何其威也。溪山烟雲, 朝暮之變態, 風花雪月, 四時之佳景, 無不入於啽哢揮灑之中, 而詩之所不能形者, 畵或有以形之, 畵之所不能發者, 詩或有以發之, 蓋與之相須, 而不可以相無也。

於是 亭之勝絶者, 遇二氏而三勝具焉。余故名是亭, 曰三勝, 遂爲之記。


庚申 季夏 歸鹿山人記


“이중희 (이춘제)의 '서원'의 정자가 북산 아름다운 곳을 차지하니 계곡은 그윽하고 깊으며 면계는 좌우로 트여있고 고송이 빽빽하다. 곧 그 중에 층을 지어 계단을 삼고 꽃과 대나무를 벌려 심었으며, 구덩이를 파 못을 만들고 마름과 가시연을 놓았다. 위치가 깊고 정연하여 신묘한 운치가 있으니, 북산 일대에 대게 명원승림이 많으나 중희의 정자가 그 빼어남을 독차지 하였다.


하루는 중희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이 정자가 완성되는 때가 마침 내 지비지년知非之年1) (50세, 만 49세)이 되니 그런고로 혹 '사구'를 그 이름으로 삼을까 또 '세심대'와 '옥류동'의 사이에 있으니 그런고로 혹 '세옥'을 그 이름으로 삼을까도 하는데, 그대가 선택하여 주시오." 하였다. 내가 답하여 말하기를, "사십의 잘못을 아는 것이 비록 군자가 덕을 닦아 나아가야 할 바 이기는 하나 이 정자에 그 이름을 붙이기에는 적절치 않고, 또 옥류동과 세심대는 돌아보면 곧 족한데 (그것을 이름으로) 중복하는 것은 정자의 격을 떨어뜨리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정자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천의 시와 겸재의 그림을 좌우로 불러 맞아들여 주인이 되었다." 하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여기에 있네. 무릇 이태백·두보의 시와 고개지·육탐미의 그림은 천하에 이름이 났으나 그 출생한 것이 각각 떨어져서 앞뒤로 달리 하여 동시에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였기에, 비록 향로봉의 폭포, 동정호의 누각에 시는 있되 그림은 없었으니 이는 천고승지의 한스러움이었다. 지금 사천, 겸재 씨의 시와 그림은 모두 같이 가히 일세에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있고 그 사는 곳이 모두 그대의 정자에서 멀지 않네. 무릇 이 정자의 빼어남으로 또 다행히 두 씨 (두 분께)에 인접하여 매일 지팡이를 들고 짚신을 신고 서로 한 자리에 오갈 수 있으니 이것은 거의 이태백과 두보를 왼편에 두고 고개지, 육탐미를 우측에 둔 것과 같으니 그 얼마나 위엄 (존엄)한가. 계산에 끼는 안개구름이 아침과 저녁으로 변하는 모습과 바람에 살랑대는 꽃으로부터 눈 위에 비치는 달빛에 이르는 사시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가 시와 그림 속에 들어오지 않음이 없는데, 시가 형용할 수 없는 바는 혹 그림이 형용하는 것에 있고 그림이 발현하지 못하는 바의 것은 혹 시가 그것을 발현하는 것이 있기에 대게 서로 더불어 꼭 필요하여 없을 수 없다. 이에 정자의 빼어난 것이 이씨 (사천과 겸재)를 만나 삼승을 갖추게 되었다. 나는 그런고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승'이라 하고 마침내 이를 위하여 기록한다. (기를 짓는다.)


경신년 계하 (1740년 계절 여름에) 귀록산인이 적는다.2)”     


이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를 지은 귀록 조현명은 이어 시 한 수를 지어 적는다. 


迢遞西亭出世塵,

種花成列鑿池新,

槎川佳句謙齋畵,

 左右招邀作主人。


아득히 둘러진 서원소정 세상의 티끌을 몰아내고

꽃을 심어 성렬하고3) 연못을 새로 팠네.

사천의 아름다운 시구와 겸재의 그림을

좌우로 불러 맞이하여 주인이 되었네.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는 크게 이중희의 집 후원과 그 정자 서원소정의 위치와 정경을 묘사한 도입부와 서원정자의 이름을 ‘삼승정三勝亭’이라 짓게 되는 이유와 과정을 보여주는 본문, 그리고 첨부된 7언 율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서원의 단장이 마무리 되는 때가 마침 자신의 지비지년知非之年 (50세, 만 49세)이 되는데, 이에 집 후원 정자인 서원소정西園小亭의 이름을 자신이 지은 ‘사구정四九亭’과 ‘세옥정洗玉亭’ 중에서 택해여 달라 청하는 이중희 (이춘제)의 편지에 귀록 조현명은 먼저 이중희의 후원 정자인 서원소정의 위치와 정경에 관한 세세한 설명과 묘사를 한다.


李仲熙 西園之亭, 占北山佳處, 溪壑 窈以深, 面界 敞以豁左右 古松森然, 卽其中, 級之爲階, 而花竹列焉, 坎之爲池, 而菱芡被焉。位置甚整, 妙有韻致, 沿北山一帶, 蓋多名園勝林, 而獨仲熙之亭, 擅其勝絶焉。


“이중희 (이춘제)의 '서원'의 정자가 북산 아름다운 곳을 차지하니 계곡은 그윽하고 깊으며 면계는 좌우로 트여있고 고송이 빽빽하다. 곧 그 중에 층을 지어 계단을 삼고 꽃과 대나무를 벌려 심었으며, 구덩이를 파 못을 만들고 마름과 가시연을 놓았다. 위치가 깊고 정연하여 신묘한 운치가 있으니, 북산 일대에 대게 명원승림이 많으나 중희의 정자가 그 빼어남을 독차지 하였다4).”

 

 

 

도 6. 겸재謙齋 정선鄭敾,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중〈서원소정西園小亭〉(경신년庚申年, 1740), 견본담채絹本淡彩, 67.5 x 40.0cm, 개인소장

 

 

 

도 7. 겸재謙齋 정선鄭敾,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중〈한양전경漢陽全景〉(경신년庚申年, 1740), 견본담채絹本淡彩, 67.5 x 40.0cm, 모암문고 소장


서원과 정자의 모습을 서술해 놓은 위 기록과 이어지는 소정의 이름을 ‘삼승정三勝亭’이라 짓게 되는 연유와 과정, 그리고 마지막 시문을  살펴보면, 귀록이 서원아회西園雅會 (기미년 여름, 1739) 후 이춘제의 요청에 의하여 겸재가 그려준 ‘서원소정西園小亭’도 (도 6)와 ‘한양전경漢陽全景’도 (도 7)를 본 후 이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를 짓지 않았나 생각된다5). 그만큼 경지를 뛰어넘은 겸재의 필력이 돋보이는 위 두 그림과 내용이 꼭 맞아 떨어진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정의 이름을 짓게 되는 연유와 과정을 알아보자.


一日 仲熙書來, 以爲斯亭之成, 適在吾知非年, 故或名之爲四九, 以且在洗心臺, 玉流洞之間, 故或明之爲先玉, 子其擇焉。

余復之曰, 四十知非, 雖君子所以進德者, 然其於名斯亭也, 汎以不切, 玉流 洗深, 顧卽足, 以重斯亭也。余嘗登子之亭, 而賦詩曰, 槎川佳句 謙齋畵, 左右招邀作主人, 亭之名, 在是矣。

夫李杜之詩, 顧陸之畵, 名於天下。然其生也, 落落相先後, 不與之同時竝峙, 雖以香爐之瀑, 洞庭之樓, 有詩而無畵, 此千古勝地之恨也。

今槎川謙齋氏之詩與畵, 俱可爲 妙絶於一世, 而其所居, 皆不遠於子之亭也。夫以斯亭之勝, 又幸隣於二氏, 日以杖屢, 相周施於一席, 殆若左李杜, 而右顧陸。何其威也。溪山烟雲, 朝暮之變態, 風花雪月, 四時之佳景, 無不入於啽哢揮灑之中, 而詩之所不能形者, 畵或有以形之, 畵之所不能發者, 詩或有以發之, 蓋與之相須, 而不可以相無也。

於是 亭之勝絶者, 遇二氏而三勝具焉。余故名是亭, 曰三勝, 遂爲之記。


庚申 季夏 歸鹿山人記


“하루는 중희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이 정자가 완성되는 때가 마침 내 지비지년 (50세, 만49세)이 되니 그런고로 혹 '사구'를 그 이름으로 삼을까 또 '세심대'와 '옥류동'의 사이에 있으니 그런고로 혹 '세옥'을 그 이름으로 삼을까도 하는데, 그대가 선택하여 주시오." 하였다. 내가 답하여 말하기를, "사십의 잘못을 아는 것이 비록 군자가 덕을 닦아 나아가야 할 바 이기는 하나 이 정자에 그 이름을 붙이기에는 적절치 않고, 또 옥류동과 세심대는 돌아보면 곧 족한데 (그것을 이름으로) 중복하는 것은 정자의 격을 떨어뜨리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정자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천의 시와 겸재의 그림을 좌우로 불러 맞아들여 주인이 되었다." 하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여기에 있네. 무릇 이태백·두보의 시와 고개지·육탐미의 그림은 천하에 이름이 났으나 그 출생한 것이 각각 떨어져서 앞뒤로 달리 하여 동시에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였기에, 비록 향로봉의 폭포, 동정호의 누각에 시는 있되 그림은 없었으니 이는 천고승지의 한스러움이었다. 지금 사천, 겸재 씨의 시와 그림은 모두 같이 가히 일세에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있고 그 사는 곳이 모두 그대의 정자에서 멀지 않네. 무릇 이 정자의 빼어남으로 또 다행히 두 씨(두 분께)에 인접하여 매일 지팡이를 들고 짚신을 신고 서로 한 자리에 오갈 수 있으니 이것은 거의 이태백과 두보를 왼편에 두고 고개지, 육탐미를 우측에 둔 것과 같으니 그 얼마나 위엄 (존엄)한가. 계산에 끼는 안개구름이 아침과 저녁으로 변하는 모습과 바람에 살랑대는 꽃으로부터 눈 위에 비치는 달빛에 이르는 사시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가 시와 그림 속에 들어오지 않음이 없는데, 시가 형용할 수 없는 바는 혹 그림이 형용하는 것에 있고 그림이 발현하지 못하는 바의 것은 혹 시가 그것을 발현하는 것이 있기에 대게 서로 더불어 꼭 필요하여 없을 수 없다. 이에 정자의 빼어난 것이 이씨 (사천과 겸재)를 만나 삼승을 갖추게 되었다. 나는 그런고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승'이라 하고 마침내 이를 위하여 기록한다. (기를 짓는다.)


경신년 계하 (1740년 계절 여름에) 귀록산인이 적는다.”     


이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서원아회西園雅會가 이루어진지 꼭 일 년 후에 이중희 (이춘제)가 귀록 조현명에게 자신이 지은 집 후원 내 정자의 이름 ‘사구정四九亭’과 ‘세옥정洗玉亭’ 중 택하여 달라는 편지를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춘제는 이러한 청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一日 仲熙書來, 以爲斯亭之成, 適在吾知非年, 故或名之爲四九, 以且在洗心臺, 玉流洞之間, 故或明之爲先玉, 子其擇焉。


“이 정자가 완성되는 때가 마침 내 지비지년 (50세, 만 49세)이 되니 그런고로 혹 '사구'를 그 이름으로 삼을까 또 '세심대'와 '옥류동'의 사이에 있으니 그런고로 혹 '세옥'을 그 이름으로 삼을까도 하는데, 그대가 선택하여 주시오.”


이유인즉, 서원의 정자가 완성되는 때가 마침내 자신의 지비년知非年 (지비지년知非之年)이 되므로 이를 기념하여 정자의 이름을 ‘사구정四九亭’이라 지을까 혹은 정자의 위치가 세심대洗心臺와 옥류동玉流洞 사이에 있으니 ‘세옥정洗玉亭’이라 할까 귀록 조현명에게 조언을 구하게 되었고 이에 조현명은 이중희 (이춘제)가 지은 정자의 두 이름이 모두 어울리지 않음을 지적하고 정자의 빼어난 위치와 풍광이 당대 최고였던 겸재 정선의 그림과 사천 이병연의 시와 함께 ‘삼승三勝6)’을 이루었다는 것을 연유로 정자 (소정)의 이름을 ‘삼승정三勝亭’이라 칭하기를 권유하고 이 기록을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로 적어 이춘제에게 회답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좀 석연치 않은 점이 눈에 띈다. 기존의 연구에서 이 〈서원소정기〉의 내용과 씌어진 기년 (경신 1740)을 근거로 이 해를 이춘제의 지비년知非年 (50세, 만 49세)으로 보았는데 이는 정확치 않다. 《사마방목司馬榜目7)》,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8)》 등 시험관련 기록들과 《조선왕조실록》에 이춘제의 생년生年 (1692)과 몰년沒年 (1761)이 전하는데 이 기록들을 토대로 이춘제의 지비년을 계산해보면 신유년辛酉年 (영조 17, 1741)이 되어야 정확하다.


또 하나,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서원소정기〉의 도입부 내용과 겸재 정선의 ‘서원소정西園小亭’도와 ‘한양전경漢陽全景’도가 일치하기에 귀록이 이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를 쓰기 전 위 겸재의 두 폭 그림을 보았었고, 따라서 ‘서원소정’도와 ‘한양전경’도 두 그림은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앞부분에 첨부되어있던 겸재의 세 폭 그림 ‘서원아회’도, ‘옥동척강’도, ‘풍계임류’도 (기미년 1739)와는 시차를 두어 경신년 (1740)9)에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부분도 명확치 않다.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의 도입부 내용10)과 본문 첫 부분을 살펴보면, ‘以爲斯亭之成, 適在吾知非年’ [이 정자가 완성되는 때가 마침 내 지비지년 (50세, 만 49세)이 되니]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 내용과 문구에 따르면 이춘제의 지비(지)년이 신유년辛酉年 (1741)이므로 귀록 조현명이 이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를 지었던 경신년庚申年 (1740) 당시에는 아직 서원西園과 정자 (소정小亭)를 꾸미고 단장하는 치원사업治園事業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1). 하지만 ‘서원소정’도와 ‘한양전경’도 그림을 살펴보면 정원과 정자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겸재의 ‘서원소정’도와 ‘한양전경’도가 이춘제의 지비(지)년인 신유년辛酉年 (1741)에 그려졌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이상에서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내內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와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의 내용을 통하여 서로 풍광이 뛰어난 정원의 정자에서 만나 주변의 자연과 승경勝景을 유람하고 탁족과 물놀이를 즐기고 파하기 전에 모여 서로 운韻을 띄우고 시를 짓고 차운次韻하여 화답하며 아회가 파罷함을 아쉬워하는,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지음에 벗에게 의견을 구하고 또 그 요청에 근거根據와 전거典據를 들어 이름을 정하고 권하매 이러한 모든 기록을 남기며 시 한수로 마무리하는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들의 풍류風流의 전형적인 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의 7언 시가 향기롭다.


迢遞西亭出世塵,

種花成列鑿池新,

槎川佳句謙齋畵,

 左右招邀作主人。


아득히 둘러진 서원소정 세상의 티끌을 몰아내고

꽃을 심어 성렬하고 연못을 새로 팠네.

사천의 아름다운 시구와 겸재의 그림을

좌우로 불러 맞이하여 주인이 되었네.


1) 나이 50세 (만 49세)를 가리킨다.

    위衛나라의 대부大夫 거백옥이 나이 50이 됨에 지난 49년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 말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2) 최완수, 상동서 (현암사, 2009), p. 24.

    최완수, 상동서 (범우사, 1993), p. 190.

    이강호, 상동서 (삼화인쇄주식회사, 1978), p. 15.


 

3) 줄을 이루게 하고.


 

4)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의 이 내용이 겸재의 ‘서원소정’도와 ‘한양전경’도에 그대로 나타난다. 


 

5)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중〈한양전경漢陽全景〉도와 〈서원소정西園小亭〉도가 그려진 연대가 명확치 않다. 뒷부분의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


 

6) 세 가지 빼어남.


 

7) 조선시대 사마시司馬試:監試 급제자의 명부.

    처음으로 소과小科에 급제한 진사進士, 생원生員의 성명·자字·생년간지生年干支·본관·주소 등을 비롯하여,

    부父의 관위官位·생존여부, 형제의 이름·자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가 있은 뒤 인쇄하여 관계자에게 배부하였는데, 책머리에는 은문恩門이라는 시관명試官名을 적고, 책 끝에는 방중색장榜中色掌·공포색장貢布色掌·수권색장收卷色掌·시제試題·시험날짜 등을 수록하였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사마방목은 1501년 (연산군 7)에 반포된 '홍치 14년 신유 2월 생원방 (弘治十四年辛酉二月生員榜)' 등 149종에 달한다.

   [두산백과사전]



 

8) 조선 태조 초기부터 1877년 (고종 14)까지의 문과文科 급제자를 기록한 책.

    필사본. 10권 10책. 20.2×20cm. 규장각도서. 책머리에 958년 (고려 광종 9) 한림학사 쌍기雙冀의 헌의獻

    議에 따라 시부詩賦·송頌 및 시무책時務策으로 진사進士를 시험 임명한 일과 고려 역대의 과거에 급제한 인

    명 약간을 덧붙이고 있다.



 

9)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의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가 씌어지기 전.


 

10)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 내용 참조.


 

11) ‘서원소정’도, ‘한양전경’도와 귀록의 〈서원소정기〉가 그려지고 기록된 당시 서원과 정자의 모습 외에 또 다른 치원사업이 진행 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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