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아회첩

인정향투_조현명趙顯命

Moam Collection 2011. 8. 24. 13:39

 


인정향투

저자
이용수 지음
출판사
출판사 | 2011-06-17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모암논선 제1편『인정향투』. '인정이 고요한데 향이 사무친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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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이 잘못되었음.

 

조현명趙顯命

 

 

조현명 영정

 

 

조현명趙顯命, 1691 (숙종 17)∼1752 (영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이다.

   1713년 (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 (경종 1) 연잉군 (延礽君: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하여 있던 왕세제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 (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하였던 정치가이면서, 한편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환수, 결포제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는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조현명의 탄생년은 대부분의 조현명 관련 자료에서 보이는 1690년 (숙종 16)이 아니라 1691년 (숙종 17)  이 옳다. 조현명은 자신이 생전에 손수 편집한《귀록집》중 권후卷後에 자저기년自著紀年을 붙였는데 그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歸鹿集卷之二十

  

   余以肅宗卽位之十七年辛未十月庚子二十二日癸卯癸丑時。生于乾洞大第。先君夢以小兒。具新恩幞袍。謁始林君廟。始林君。祖妣洪夫人外祖。覺則已生。喜曰。兒必早貴也。邀卜者金秋星推命。秋星賀曰。此大人之命也。

   壬申。二歲。是年春。闔家遘癘。三月二十一日。先君下世。余亦幾死而蘓。冬。與叔氏文忠公。經痘。


   이 기록 첫 부분을 살피면 귀록 조현명 자신의 생시를 밝힌 ‘余以肅宗卽位之十七年辛未’ 문구를 볼 수 있다. 현재 전하는 《귀록집》이 타인에 의하여 필사된 ‘필사본’인 점을 감안하면 오기의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이본 필사본 자저기년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오기의 가능성이 낮다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 네이트 (NATE) 한국학,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귀록집 참조]

 

이용수 (모암문고), 『인정향투人靜香透 - 모암논선 茅岩論選 Ⅰ』「문인文人의 지취旨趣 I 」(에세이, 2011), pp. 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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