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_겸재謙齋정선鄭敾(1676~1759)의 기록화와 발문_1. 기록화_(1) <계상정거溪上靜居>
이 논고 앞부분에서 언급했듯 <계상정거溪上靜居>(도 7)는 겸재
謙齋71세시 숭정병인년崇禎丙寅年(1746)에《퇴우이선생진적첩退
尤二先生眞蹟帖》에 그려 넣으신 네 폭의 진경에 바탕을 둔 산수화
중 한 폭으로 현재 통용되고 있는 대한민국 1000원권 화폐 뒷면
의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다.
진적첩眞蹟帖총 16면(앞뒤 표지 포함) 중 2~3면에 걸쳐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퇴계가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
서序>를 짓고 있는 모습을 진경산수화의 연원을 열고 완성했던
화성의 필력으로 화첩의 두 면에 꽉 찬 구도로 그려냈다. 그림의
구도와 구성을 퇴계가 그의 저술《도산기陶山記》48)에 남긴 기록
들을 살펴보며 비교하여 보자.
영지산 한 가닥이 동으로 뻗어 도산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이 산
이두번(째로) 이루어졌으므로 도산이 되었다.”하고 어떤 사람은“이
산 속에 예전에 도자기 가마가 있었으므로 그러한 사실로 도산이라
한다.”하였다. 산이그렇게높고크지않으며그골짜기가휑하게비
었고 지세가 뛰어나고 위치가 편벽되지 않으니 그 옆의 봉우리와 계
곡들이 모두 손잡고 절하면서 이 산을 둘러 안은 것 같다.”49)하였고,
또그산세를설명하였는데기록을보면다음과같다.
“산의왼쪽산을동취병이라하고오른쪽산을서취병이라한다. 동취
병은 청량산에서 나와 산 북쪽에 이르러서 벌려선 산들이 아련히 보
이고서병은영지산에서나와산서쪽에이르러봉우리들이우뚝우뚝
높이 솟았다. 이 두 병이 서로 바라보며 남쪽으로 구불구불 내려가서
8~9리쯤 가다가 동병은 서로 달리고 서병은 동으로 달려 남쪽의 넓
은들판의아득한밖에서합하였다.”50) 하였다.
그림을 찬찬히 보니 과연 퇴계의 설명대로 동취병, 서취병이
마주 바라보며 남쪽의 낙천洛川(낙동강)으로 아득하게 합하여짐
을 볼 수 있다. 다시 퇴계가 이 지역의 물水과 탁영담濯纓潭, 천연
대天然臺, 반타석盤陀石,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에 관하여 설명한
기록을 살펴보자.
“산 뒤에 있는 물을 퇴계退溪라하고산남南에있는물을낙천洛川
(낙동강)이라 한다. 퇴계는 산 북쪽을 따라 낙천으로 들어가서 산 동쪽
으로 흐르고 낙천은 동병에서 나와 서쪽 산기슭 아래에 이르러 넓고
깊게고여서몇리를거슬러올라가면깊이가배를띄울만한데금같
은 모래와 옥 같은 조약돌이 맑게 빛나며 검푸르고 차디찬 증담이 이
른바탁영담濯纓潭이다. (중략) 여기서(곡구암谷口巖) 동으로몇걸음
나가면 산기슭이 끊어지고 탁영담이 가로 놓여있는데 그 위에 큰 돌
을 깎아 세운 듯 서서 여러 층으로 포개진 것이 십여 길이 되는데 그
위를 쌓아 대臺를 만드니 우거진 솔은 해를 가리며 위로는 하늘과 밑
으로 물에서 새와 고기가 날고뛰며 좌우의 푸른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이 물에 비쳐 그림자가 흔들거려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모두 볼 수 있으니 천연대天然臺라 한다. 그 서쪽 기슭에 또한 대를
쌓아서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하니그경치가천연대天然臺에못
지않았다. 반타석盤陀石은 탁영담 가운데 있다. 그 모양이 편편하여
배를 매고 술잔을 전할 만하며 매양 큰 홍수 때에는 물속에 잠기었다
가물이빠지고맑은뒤에야비로소나타난다.”51)하였다.
다시 한 번 이 퇴계의 기록들을 떠올리며 이 그림을 찬찬히 완
상玩賞하여 보기 바란다. 어느 곳 하나 퇴계의 설명과 겸재의 그
림이 부합되지 않는 곳이 없다. 확실히 겸재는 도산서원을 수차
례 방문하여 실사하였었을 것이고 또한 퇴계의 이《도산기陶山
記》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겸재의 나
이 58세~64세시(1734~1740)에 경상북도 하양현감河陽縣監과 청
하현감淸河縣監을 지냈었던 그가 퇴계 선생이 그의 서재에서 <회
암서절요晦庵書節要서序>를 짓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진경산수
의 화성인 겸재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야말
로 겸재 71세시의 완숙한 필치로 거침없이 그렸으나 어느 한곳
의 미흡한 곳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림에 관한 이론理論과 실기實
技를 겸하고, 퇴계 선생의 말씀처럼 도道에 이른 경지가 아니고
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러한 이 <계상정거溪上靜居>도圖에 관한 잡음雜音이 들리고
있다. 하나는 그림 내內서당의 이름(명칭)에 관한 잡음이다. 하지
만 이 논란은 사실 무의미하다. 필자가《도산기陶山記》와 <퇴계
연보>의 기록들을 살펴보니,
계상은 지나치게 한적하여 회포를 시원히 함에는 적당하지 않아 산
남쪽(도산)에 땅을 얻었다. (중략) 정사년(1557)에서 신유년(1561)까지5
년 만에 당사 두 채가 되어 거처할만 하였다. 당은 세 칸인데 가운데
한칸은완락재玩樂齋니 주선생의 명당실기에“완상하여 즐기니 족
히평생토록지내도싫지않겠다.”라고하는말에서따온것이고동쪽
한 칸은 암서헌岩栖軒이라 하였으니 주선생의 운곡시에“자신은 오
래도록가지지못했으나바위틈에깃들어조그만효험이라도바란다.”
는 말을따온 것이다. 또 합하여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현판을달았
다. 정사는 모두 여덟 칸이니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 관란헌
觀瀾軒이니 합쳐서 농운정사 雲精舍라고 현판을 달았다.”52)라 기
록되어있다.
세간에“정사년(1557)에서 신유년(1561)까지 5년 만에 당사 두
채가 되어 거처할만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도산서당이 1561년
완성되었다 하여, “퇴계가 무오년(1558)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
서序>를 짓고 있는 계상정거 내의 정경은 위 기록으로 말미암아
도산서당의 정경이 아니라 계상서당의 정경이 아닌가?”라는 의
문을 제기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 논란은 사실 의미가 없다.
‘도산서당’이나‘계상서당’두 곳 중의 한 곳이면 어떠한가? 퇴
계 선생의 고고한 정신세계와 모습이 화성 겸재의 완숙한 필치
로 구현되어 있는 점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닌가? 어쨌든 이러
한 의문에 답을 퇴계 선생의 어투를 빌어 답하겠다. 그대의 말이
그럴듯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앞서 밝힌《도산기陶山記》의 기
록에“정사년에서 기유년 5년만에 당사 두 채가 지어졌다.”하였
다. 대저 이 당사堂舍두 채의 의미는 완락재와 암서헌 두 칸으로
이루어진 작은 퇴계의 거처와 모두 여덟 칸으로 이루어진 시습
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 관란헌觀瀾軒을 합한 농운정사 雲精舍
(교육과 제자들을 위한 건물)를 이름이다. 공사가 정사년(1557)에
시작되었고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서序>가 무오년(1558)에 씌어
졌으니 1년 이상의 간격이 있다. 이 기간 안에 두 칸 작은 건물의
신축이 충분히 가능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퇴계의 거처인 완
락재가 먼저 지어졌다는 사실은《퇴계집》내의 <언행록 중 이덕
홍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53)
그리고 또 그림을 살펴보면, <계상정거>도 좌측 상단에 두개
의 건물이 아련하게 보인다. 표암 강세황이 그렸다는 <도산서원
도>(보물 522호)와 비교하여 보니 왼편의 건물은 농암聾巖이현보
李賢輔(1467∼1555) 선생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고 있는 사당이
속해있는 분강서원汾江書院54)이고 오른쪽의 작은 건물은 농암
이현보가 하루하루 늙어 가시는 아버님을 아쉬워하며“하루하루
를 아낀다.”는 의미로 지었다는 애일당愛日堂55)이다. 분강서원은
무오년(1558) 당시 존재하지 않았었고 광해군 4~5년(1612년 혹은
1613년) 향현사鄕賢祠라 창건되었고 숙종26년(1700)에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전하므로 이 또한 이 정경이 계상서당(계상초옥)이 아
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퇴계 자신의 기록을 보면,“ 처음 내가
계상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의 초가집을 얽어 책을 간
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았었는데 (중략)”56) 계상
서당은 초가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하니 이것은 그렇
지 않다. 더 많은 이유들을 찾을 수 있겠으나 이상의 설명으로도
어느 정도 이 정경이 도산서당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또 다른 각도로 비추어 보면, 무오년(1558)에 도산서
당이 지어지지 않았었다 가정해보자.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린 때
가 1746년으로 거의 2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이고 당시는 완전한
도산서원의 모습을 갖추었을 때이다. 이 정경이 아무리 무오년
(1558) 당시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라 하나 겸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진경산수(실경산수)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다. 이러한 그가
어찌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었던 계상서당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릴 수 있었다는 말인가? 완락재에서 자신의 소박한 서기書?
(독서대)를 앞에 놓고 엄숙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회암서절요 서>
를 짓고 계시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 넣은 것만으로도 진경산
수의 대가였던 겸재로서는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첩내의 <무
봉산중>도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필자가 이 그림들을
진경산수(실경산수)에 근간을 둔 기록화라 명하였던 이유이다. 이
러한 점으로 보더라도 이 <계상정거>도 내의 퇴계가 거처하고
있는 건물은 계상서당이 될 수 없다. 겸재도 이러한 여러 상황들
을 인식했었던 듯 화제를‘계상정거溪上靜居’라 하였다. 이‘계
상’의 의미는‘계당’과‘도산’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계상(물
위, 물가)’쯤으로 생각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 하나의 잡음은 사실 일고一考의 가치조차 없는 광견폐狂犬
吠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한 인사가《퇴우이선생진
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내內의 겸재의 4폭 진경산수 기록화를 임
본위작이라 주장했다 한다.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니 주장의 근
거나 논거를 찾아볼 수 없고 참 허접하기 이를 데 없다. 먼저 이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이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
떠한 가전내력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임본위작이라 했는
데, 만일 그렇다면 이 첩의 꾸며진 상태로 보아 원본그림들을 이
첩에서 빼어내고 임본위작 그림들로 바꾸어 첩 안에 집어넣었어
야 한다. 하지만 이 진적첩은 본 논고의 앞부분《퇴우이선생진적
첩退尤二先生眞蹟帖》의 구성편에서 밝혔듯 아무런 수리나 변형된
흔적이 없는 원본 본연의 상태를 간직하고 있다.57)
또한 이 진적첩眞蹟帖내의 <계상정거溪上靜居>도 상단, 그리
고 좌우 배접mount된 부분을 살펴보면 겸재의 본本그림의 붓
선이 배접된 부분에까지 그려져 있는 부분을 볼 수 있다. 특히
좌측의 배접된 부분의 그림은 겸재가 의도적으로 낙천(낙동강)의
물줄기를 온전히 표현하였다. 이러한 부분이 <계상정거溪上靜居>
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그림 <무봉산중舞鳳山中과 풍계유택楓溪
遺宅>도 첩의 10~11면, 그리고 <인곡정사仁谷精舍와 사천?川(사
로?老) 이병연李秉淵(1671~1751)의 제시題詩>가 위치하고 있는 첩
의 12~13면에서 보여지고 있다.(도 7, 도 8, 도 9 참조) 이러한 점들
은 겸재와 겸재 차자 만수가 이 첩을 미리 꾸몄었고 그 원본첩
위에 겸재가 그렸다는 점을 더욱 견고히 입증한다 할 수 있다.
진적첩 내의 배접된 면들은 진적첩 총16면 중(앞뒤 표지포함) 10
면에 나타나는데 이는 퇴계 선생의 4면에 걸친 친필수고본親筆
手稿本<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서序>와 두 면의 우암 선생의 발문
을 꾸며 붙이는 데 따른 것이다.(우암의 발문 옆에 위치한 정만수의 부
기는 원본 면에 적혀 있다.) 첩의 2~3면에 걸친 <계상정거溪上靜居>
도와 10~11면의 <무봉산중舞鳳山中과 풍계유택楓溪遺宅>도 부
분까지 배접이 되어있는 이유는 각 뒷면과 앞면의 장의 가장자
리만 풀(접착제)을 발라 배접을 하게 되면 앞뒷면 힘의 불균형으
로 종이의 상태가 변형되게 된다.58) 이러한 점을 막기 위하여 각
앞면들과 뒷면의 가장자리 부분도 배접을 한 것이다. 다음 뒷면
들에 위치한 <인곡정사와 사로(사천)의 제시> 그리고 다음 장의
두 면은 배접이 되어있지 않다.(도 9, 도 10 참조)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 진적첩 내의 겸재의 진경산수
그림들이 임본위작이라는 주장은 한낱 광견폐성狂犬吠聲에 지나
지 않는다.
그가 이 첩 내 산수화들과 비교하여 보라 제시한 여러 그림들
도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겸재의 그림은 진경眞景(실경實
景)에 바탕을 두고 있고 따라서 장소의 때와 정경과 또 겸재의 연
배에 따라 그 필치나 구도, 표현양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데 이 인사는 아무런 이러한 점들을 고려치 않았다. 전혀 기본이
안 된 자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 인사가 제시한 그림들과《퇴우
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내의 겸재의 4폭 진경산수화들을
비교해보라. 어찌 이런 완숙한 필치와 구도의 겸재 만년의 작품
들을 이 인사처럼 수준이 낮다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진적첩
내의 퇴계의 친필수고본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서序>, 우암의
두 번에 걸친 발문, 사로(사천) 이병연의 제시 등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오직 정만수의 발문에 관하여 짧게 언급하며 또 이
발문은 진작이라 한다. 이 논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어
보고《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
겨 보기를 바란다. 이 퇴계 선생의 친필수고본 <회암서절요晦庵
書節要서序>와 우암의 두 번에 걸친 발문만으로도 보물寶物이
아니라 국보國寶로 지정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작태를 보며, 두 고사성어가 떠올라 머
릿속에서 맴돌며 떠나지를 않았다. 이 두 성어로 작태를 평한다.
와부뇌명 瓦釜雷鳴59)
일광견폐형백견폐성 一狂犬吠形百犬吠聲60)
한 가지 더, 필자는 이전 저서와 많은 다른 글들을 통하여 올
바르고 정확한 감정을 하기위해서는 서도書道의 수준이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었다. 이 인사의 저서
《진상眞相》에 자신의 표제‘진상’과 이 인사의 스승에게 바친다
는 글을 넣어 놓았는데 그 수준이 자신이 보기에도 민망해 할 정
도의 수준이다. 이 정도의 수준으로《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
生眞蹟帖》내의 겸재의 화제畵題글들이나 아니 정만수의 책 표제
글이나 발문 글과 비슷하게라도 쓸 수 있겠는가? 이런 수준이하
의 평할만한 가치도 갖추지 못한 글들을 책의 표제와 스승께 바
치는 글로 사용하고 책에 싣다니, 다른 점은 몰라도 이 분의 만
용과 무모함, 그리고 그 뻔뻔함은 그 평가를 해줄만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준의 안목으로 평해진 이 책의 제목을《진상眞
相》이 아닌 우리가 흔히 말하는‘진상이다 혹은 진상을 떤다.’
는 의미의《진상》이나《광견폐서狂犬吠書》라 칭함은 어떨지 모
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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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퇴계연보>에 의하면 신유년
(1561년) 퇴계 나이 61세시에《도
산기陶山記》를 지으셨다 전하고,
판각본으로의 발간은 그로부터 11
년 후 1572년에 이루어졌다.
49) 국제퇴계학회 간《퇴계선생과
도산서원》(한국출판사, 1991),
pp. 66~67; 윤천근, 김복영, 《퇴
계선생과 도산서원》(지식산업사,
1999), pp. 34~35.
50) 상동서 pp. 66~67.
51) 상동서 pp. 69~70.
52) 퇴계의《도산기陶山記》와 <퇴
계연보>는 앞에서 언급한 서적들
외에 수많은 간행본들이 있다. 자
신에게 맞는 아무 한 책을 골라 읽
어 살펴보기를 바란다.
53)《 퇴계집》내의 <언행록> 중 이
덕홍의 기록 참조.
장기근 역《퇴계집》(명문당, 20
03), pp. 603~605.
54) 분강서원은 광해군 4~5년
(1612년 혹은 1613년) 향현사鄕賢
祠라 창건되었고 숙종26년(1700
년)에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전하
는데 원래는 안동군安東郡도산
면陶山面분천동汾川洞에 위치하
였으나 안동댐 수몰로 1975년 현
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서
원의 기원에 관한 좀 더 정확한 연
구가 필요하다.
55) 애일당 역시 안동군安東郡도
산면陶山面분천동汾川洞에 위치
하였으나 안동댐 수몰로 1975년
원래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km
쯤 떨어진 영지산靈芝山(436m)
남쪽 기슭으로 이건하여 보존하
고 있다.
56) 송재소, “퇴계의 은거와‘도
산잡영’《, 도산서원陶山書院》(한
길사, 2001), pp. 266~267.
57) 문화재청의 자료설명과 첨부
한《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
眞蹟帖》원본사진자료들을 참조
하여 보기 바란다.
58) 공책의 한 면에만 풀을 발랐
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리
라 생각된다.
59) 굴원屈原의《초사楚辭》<복거
편卜居篇>.
60) 왕부王符의《잠부론潛夫論》
〈현난편賢難篇〉, 필자가‘광狂’자
한 글자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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